김 달 관(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2013년 2월 17일 일요일 에콰도르에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현 대통령인 라파엘 코레아(Rafael Correa)를 비롯하여 총 8명의 대선 후보자가 경쟁했다. 에콰도르 선거관리위원회(Consejo Nacional Electoral: CNE)에 따르면 1200만 명의 유권자 중에서 라파엘 코레아는 57.17%를 획득했다. 결과가 확정되면 대통령 임기는 2013년 5월 24일에 시작되어 2017년까지이다. 이에 라파엘 코레아는 2006년부터 11년간 실질적으로 에콰도르 대통령이 되는 기록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조국동맹'(Alianza PAIS)이 52.30%를 획득해서 절대다수당이 되었다. 새로운 국회의원 배분방식인 동트식(Sistema D'Hont)을 적용하게 되면 총137석에서 98-100석의 의석을 배분받게 되어있다.
◆ 2013년 2월 에콰도르 대통령 선거
에콰도르는 2013년 2월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대통령 선거 예비 결과에 따라, 현재의 대통령인 라파엘 코레아가 57.17%로 당선되었다. 이에 결선투표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에콰도르 선거법은 대통령 선거에서 어떠한 대선 후보자가 총 40% 이상을 득표하지 못하거나, 1위 득표자와 2위 득표자 사이의 격차가 10% 미만일 때에는 두 번째 단계로서 결선투표를 하게 되어 있다.

2013년 대통령 선거의 2위는 금융인인 기예르모 라소(Guillermo Lasso)가 차지했다. 기예르모 라소는 57세의 금융인으로서 에콰도르의 중요한 은행 중의 하나인 과야킬 은행의 총재를 역임했고, 1999년 하밀 마우아드 정권에서는 경제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경제부 장관 시절에 은행예금을 동결하면서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이에 2000년에 달러화를 선언하게 된다. 현재도 에콰도르의 공식화폐로서 달러가 사용되고 있다. 그밖에 대통령 선거후보자들은 1-6%를 획득하였다. 이에 전통적인 정당들은 실질적인 의미를 상실했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에콰도르 대통령 선거에서 1위로 대통령에 당선된 라파엘 코레아는 57.17%를 차지했고, 2위는 기예르모 라소가 22.68%를 차지했다. 1위와 2위의 격차는 34%로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2011년과 2012년 대선 출마자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1위는 라파엘 코레아로서 변함이 없었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2위는 기예르모 라소로 굳어지는 상황이었다. 2012년 10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라파엘 코레아는 40%, 기예르모 라소는 23%였다. 대통령 선거 결과와 비교하면, 기예르모 라소의 득표율은 여론조사 지지율과 거의 같다. 다만 라파엘 코레아는 여론조사 때보다도 17%가 더 상승했다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라파엘 코레아가 큰 격차를 두고 절대 과반수를 차지했다. 게다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로운 배분 방식인 동트식을 적용하게 되어 있는데, 이 방식의 특징은 지지율이 가장 높은 정당이 실제 지지율보다 높은 의석을 배분받아 국회의 정치적 안정을 높이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에 동트식에 따라 여당인 '조국동맹'은 총137석 가운데 98-100석을 배분받게 되는데, 이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조국동맹이 국회의 절대다수가 되었다. 이것은 라파엘 코레아의 의지가 관철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3년 대통령 선거의 특징 중에서, 기존에는 18-65세 사이의 에콰도르 인은 의무적으로 투표해야 했으나, 이번에는 16세 이상도 의무가 아니라 선택적으로 선거에 참여하고 싶으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23만 명의 해외 유권자도 투표할 수 있도록 했다. 대통령 선거 참관을 위해 미주기구(OEA), 남미국가연합(UNASUR) 등 국제기구에서 320여명의 참관단을 에콰도르에 파견했다. 국제기구 참관단은 2013년 에콰도르 대통령 선거가 투명하게 진행되었다고 표명했다.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의 성과
대통령 선거가 있기 얼마 전에 부패 스캔들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라파엘 코레아가 대통령 선거에서 큰 폭의 격차를 두고 석권했다. 선거 이전인 2012년 12월 19일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의 사촌인 페드로 델가도(Pedro Delgado)가 에콰도르 중앙은행 총재직을 사임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페드로 델가도가 경제학과를 졸업하지 못하고 수료했다는 것이다. 보다 심각한 것은 실행하지 않은 프로젝트를 위해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의 친구들에게 부당한 대출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라파엘 코레아의 친형제인 파브리시오 코레아(Fabricio Correa)는 정부와 3억 달러 이상의 대규모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통령 선거 직전에 라파엘 코레아 측근의 부패 스캔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파엘 코레아는 큰 격차로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이것은 라파엘 코레아의 지지가 아직도 높다는 것을 의미하고, 진보적인 국가개혁인 수막 카우사이("다양성 및 자연과 조화에 기초한 공생의 새로운 방식")를 계속해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라파엘 코레아의 대선 당선은 1979년 민주화 이후 정당정치의 후퇴와 전통적인 정당 및 지도자가 정치적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에콰도르는 석유 붐에 기초해서 2010년에는 13% 성장했고, 2011년에는 8% 성장했다. 2011년에 많은 공공투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다. 외채는 GDP의 24%에서 14%로 감소했다. 최근 5년 동안 빈곤률은 36.7%에서 27%로 감소했다. 2012년 말 실업률은 4.1%로 감소했는데, 이것은 최근 25년 동안 가장 낮은 수치이다. 재정수입은 2006년에는 GDP의 12%였으나, 19%로 재정수입이 확대되었다. 인간발전인환권(Bono de Desarrollo Humano)을 2백만 명의 빈곤층에게 지급했고, 35달러에서 50달러로 인상했다. 도로에도 이전의 정부보다 3배 많은 투자를 했고, 교육재정도 이전정부와 비교해서 2배가 증가했다. 그러나 라파엘 코레아 정부에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증가하고 있고, 비판을 잘 수용하지 않으며, 언론에 대한 통제가 증가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2013년 에콰도르 대선과 전망
에콰도르는 1979년 이후 민주화가 시작되었지만, 1997-2005년 동안에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불안을 겪었다. 즉 1997년 압달라 부카람 대통령이 선거에서 투표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국민의 의견을 무시하면서 국민이 압달라 부카람 대통령을 임기 중에 탄핵소추 했다. 또한 2000년에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하밀 마후아드도 정치적 부도덕성과 부패로 인해 탄핵소추 되었다. 2005년에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루이스 구티에레스도 권력남용과 부패로 인해 국민에 의해서 대통령에서 해임되었다. 이처럼 1997-2005년 동안에 선거로 당선된 3명의 대통령이 임기 중에 탄핵소추를 겪는 정치적 불안정을 겪었다. 그리고 1999년 금융위기는 1982년에 도입한 신자유주의의 누적된 모순의 결과로서, 에콰도르 독립 이후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경제위기였다.
이러한 에콰도르의 경제적ㆍ정치적 상황에서 1990년을 기점으로 원주민운동이 발생했다. 이후 2005년에는 시민사회도 대안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목적은 국가를 '개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재건'하는 것이었다. 어째든 시민사회운동은 국가개혁을 위해 헌법제정에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수막 카우사이라는 개념이, 2008년 신헌법의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개념'으로서 신헌법을 관통하고 있다. 수막 카우사이는 "다양성 및 자연과 조화에 기초한 공생의 새로운 방식"으로서 '공생'을 추구한다. 수막 카우사이는 에콰도르 국가개혁을 추진하는 최상위이자 최고의 준칙이 되었다.
에콰도르와 볼리비아에서 폭넓은 변혁이 시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에서 전반적으로 폭넓은 변혁을 시도하기 위한 어려움이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산토스는 국가개혁의 어려움을 2개로 보고 있다. 첫째, 자본주의 종결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자본주의 종결을 고려하지 않으면서 개인주의(vs. 공동체), 경쟁(vs. 상호성), 이익(vs. 보완, 유대) 원칙이 지배적인 자본주의 축적방식에서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개선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실질사회주의 붕괴라는 관점에서부터 '자본주의 이후'(Post-capitalism)의 대안을 고려하거나, 자본주의가 신대륙에 이식되기 이전인 원주민 사회에서 작동했던 경제에서 대안을 상상하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일반적으로 정부가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방식이 현대 자본주의로부터 '자본주의 이전' (Pre-capitalism)를 고려한다면, 원주민운동은 정복ㆍ식민 이전 시대에 원주민 사회에 존재했던 것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모델을 찾으려 한다. 둘째, 식민성의 종결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식민성의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이다. 이 전통에서 독립은 식민성의 종식을 의미했고 그래서 '반자본주의'가 정치적 목표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인종적ㆍ종족적 투쟁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내적 식민성이 독립이후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경우에는 식민성이 보다 심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반자본주의'와 '탈식민성'이 정치적 목표이다. 이에 계급지배와 인종적ㆍ종족적 지배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2013년 라파엘 코레아의 성공으로 에콰도르는 수막 카우사이를 추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공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