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세계경기 침체가 쉽게 개선될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줄곧 두 자리 수를 기록하던 세계교역 증가율이 전년 동기 대비 1~3% 수준에 머무는 부진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경제 성장 둔화로 소비와 투자 수요가 함께 위축된데다 자원 수요마저 크게 줄어든 탓이다.
최근 통상환경 변화의 특징, 다자간 FTA 확산
이와 같은 세계교역의 둔화 움직임은 통상환경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최근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다자간(multilateral) Mega FTA 체제의 확산이다. 두 나라, 즉 양자간(bilateral)에 주로 체결되던 무역자유화 협정의 양상이 다수의 국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2015년 10월 초 타결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Strategic Economic Partnership, TPP)’은 이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 사이에서 진행 중인 ‘범 대서양 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와 진행 속도는 다소 더디지만 ASEAN 10개국과 한중일, 인도, 호주, 뉴질랜드가 참여하는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도 대표적인 다자간 무역자유화 협정이다.
TPP 타결 이전에도 ASEAN, NAFTA, EU 등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경제블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에는 이런 협상이 대부분 국경을 맞대거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던 반면, 최근에는 해외직접투자 증가,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물류 비용 하락, 제조업의 소프트화, 글로벌가치사슬(GVC, Global Value Chain) 확산 등에 힘입어 거리가 멀거나 이질적인 산업 구조를 가진 국가들과의 통합 움직임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 중에서도 주요 산업의 글로벌가치사슬(GVC) 세분화(fragmented)가 가장 두드러진 원인으로 꼽힌다. 전세계 공급자들이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인 생산 방식을 찾기 위한 기업들의 노력이 국가별 분업 확대로 이어진 결과다. 이처럼 글로벌가치사슬이 복잡해지면서 두 나라, 즉 양자간(bilateral)에 주로 체결되던 무역자유화의 양상도 바뀌고 있다. 양자간 FTA가 300여 개에 이를 정도로 늘어나면서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여러 국가들과 체결한 상이한 FTA 규정들로 말미암아 스파게티보울(spaghetti bowl) 현상이 심해지면서 회원국들에게 허용해온 ‘특혜’의 차별적인 효력이 상당 부분 감소한 탓이다. 과거에는 대부분 산업의 생산이 한 두 나라 안에서 이뤄져 양자간 FTA만으로도 특혜관세를 적용 받는데 별 무리가 없었지만, 해외직접투자 증가와 국가 간 생산분업 심화로 글로벌가치사슬이 복잡해짐에 따라 양자간 FTA의 장점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양자간 FTA의 약점과 한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대표적인 예가 다자간(multilateral) FTA라 할 수 있다. 생산에 관여한 모든 역내 국가들의 부가가치에 대해 누적원산지 규정이 적용된다는 장점 덕분이다. 표준이나 통관 절차 등을 여러 나라가 공유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점도 계속 커져왔다. 이와 함께 세계경제 통합 확대로 투자 및 교역 장벽이 낮아지고 S/W, OS 등 디지털 재화의 거래 비중이 높아진 것도 상품 생산의 국가별 분업을 더욱 촉진했다.
TPP 출범과 중남미 경제
그렇다면 TPP나 RCEP와 같은 다자간 Mega FTA 체결 움직임의 확산은 중남미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 영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장접근’, ‘생산분업’, ‘사업환경’ 등 세 가지 관점에서 GVC 적합도 및 비교우위, 주력산업 부가가치 등 여러 변수를 조합한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시장 접근’ 면에서는 수출입 관련 환경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별 시장 잠재력, 즉 경제 규모, 관세 및 비관세 장벽 등을 비롯해 역내/외 국가 간 무역전환 가능성도 확인 해볼만하다.
‘생산 분업’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인적자원, 인프라 등 국가별 비교우위 요소를 파악한 후 수출입 품목 구성과 누적 원산지 규정 충족 가능성을 확인하고, 지속적으로 산업구조 변화와 글로벌화 추이 등을 모니터링 해서 주요 수출 품목, 해외생산 비중 등의 결정에 반영해야 한다.
‘사업 환경’ 개선 과점에서는 각국의 제도적 환경, 즉 사전적 규제(=포지티브), 사후적 규제(=네거티브) 등의 특징을 확인하고 시장 경쟁력, 수익성 등의 경쟁 환경 변화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향후 예상되는 변수들의 움직임을 이 세 가지 관점(pillar)에서 분석한 결과, 멕시코가 최대 수혜국으로 꼽혔다. 세계에서 가장 큰 최종재 시장, 미국과 가깝고 전통 산업 기반이 비교적 잘 갖춰져 제조업 부활의 계기를 맞이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지난 2~3년새 나타났던 제조업체들의 ‘중국 → 멕시코’ 이전 움직임 더 빨라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자동차 및 관련 부품 분야에서 가장 큰 변화가 예상된다. 국가별 관세율 격차가 커서 신흥국 시장 접근 확대 여지는 아직 큰 편이나, TPP 회원국 중 7개국이 승용차 생산국이라는 점에서 경쟁이 상당히 치열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이 7개국의 자동차 생산 능력이 연간 2천7백만 대(2014년 기준, 전세계 생산의 30%)에 이를 정도로 높은 수준이어서 역내/외 국가 간에 무역전환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원 산업의 고부가가치화 희망하는 칠레와 페루 역시 글로벌 협력을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제도와 규범의 전향적 개선을 통해 미국, 호주, 일본 등 기술 선진국들과의 협력을 빠르게 늘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역내 국가 간 관세 및 비관세 장벽 완화로 시장 접근 개선과 ‘무역전환’ 효과가 기대될 뿐만 아니라 확장적 GVC 구성에 성공할 경우, ‘무역창출’ 효과 통한 추가적인 시장 확대도 가능할 전망이다.
단, 누적원산지 규정의 이점을 얻으려면 다층적인 GVC 형성이 필수적이어서 체감 효과는 국가별로 크게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생산공정이 단순하거나 물류비용 부담이 큰 업종은 효과를 누리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미래 지향적 혁신 산업 기반이 취약하고 인적자원이 부족하다는 점도 낙관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요 걸림돌이다.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
이런 조건들에 비춰볼 때 2016년 이후 통상환경 변화가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다음 네 가지에 유의해야 한다.
먼저 TPP가 모든 회원국들의 국내 비준 절차를 무사히 마치고 발효된다는 것을 전제로 가늠해본다면, 우리가 TPP에 가입하지 않을 경우 멕시코와 페루, 일본 등을 비롯한 TPP 회원국들에게 미국 시장을 잠식당할 우려가 크다. 한미 FTA를 통해 누려온 상대적 우위를 더 이상 향유할 수 없고, TPP 회원국들이 서로의 비교우위를 바탕으로 글로벌 생산분업 체제를 강화하는 것도 우리 기업들에게는 부담될 수밖에 없다. 우리 기업들의 대미 수출 상품이 특혜관세를 받기 위해서는 한국 내 원산지 비율을 일정 수준 이상 충족시켜야 하는 반면, 멕시코나 칠레 기업들은 일본, 베트남 등 여러 TPP 회원국들과 다각적인 분업구조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멕시코와 일본 기업들의 글로벌화가 많이 진전된 자동차 및 관련 부품, 철강, 전자전기 등의 분야를 중심으로 시장 잠식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중남미 내에서 일본과의 경쟁 심화에도 대비해야 한다. TPP 타결을 통해 한미FTA 이후 일본 통상 정책의 최우선 과제였던 미국과의 FTA 체결을 성사시켰다는 점도 의미가 크지만, 일본 기업들의 해외직접 투자가 활발했던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멕시코, 페루 등을 아우르는 거대한 글로벌 생산 분업 네트워크까지 덤으로 얻으면서 다자간 FTA의 이점을 잘 살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저성장 지속에 따른 전세계 교역 둔화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00년대 초반 2.5에 육박했던 세계경제 성장률 대비 교역탄성치가 현재는 절반 조금 넘는 1.3 수준까지 떨어졌다. 즉, 과거에는 경제성장률이 한 단위 높아지면 소비, 투자 등의 연쇄 효과로 교역이 두 단위 이상 더 늘었지만, 이제는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그 몫 외에 30% 정도밖에 추가로 늘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경제 전체 관점에서 볼 때의 특징이고 산업이나 업종, 상품별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이 다를 수 있는 만큼 교역탄성치가 높은 상품이나 업종을 발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치안 악화와 지정학적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재정 악화로 치안이 위협받는 중남미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는데다 경기 침체와 양극화로 각종 범죄와 폭력 관련 보도 비중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또한, 누적된 불만이나 긴장이 작은 충격에 의해 발화되면서 정치적 갈등과 심지어 폭력 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 특히 중동 지역에서 시작된 종교적 갈등과 테러 사태가 유럽으로까지 확산된 상황에서 최근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등에서 이뤄진 좌우 정권 교체가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