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순(연합통신 브라질 특파원)

  

브라질 대선에서 남미 정치권력의 미래를 본다

  2014년은 브라질에 대단히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은 1950년 이후 64년 만에 월드컵 축구대회를 개최한다. 축구의 나라 브라질에서 벌어질 '별들의 전쟁'은 벌써부터 전 세계 축구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브라질 축구가월드컵 통산 6회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까?

  월드컵의 흥분이 채 가시기 전에 브라질은 대선 정국으로 빠져든다. 브라질에서 월드컵은 단순한 축구대회로 끝나지 않는다. 축구는 곧 삶이자 생활이고 정치다. 브라질 대표팀의 월드컵 성적이 10월 대선 분위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는 이유다. 축구와 정치의 함수관계, 브라질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사회현상의 단편이다.

  대선은 10월 5일1차 투표를 치르고,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득표율 1∼2위 후보가 10월26일 결선투표로 승부를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대선과 함께 전국 27개 주의 주지사와 연방상원의원 81명 가운데 3분의 1, 연방하원의원 513명 전원, 각 주의 주 의원을 선출하는 투표도 시행된다.

  

유력 대선 주자는 4명…여론조사 "호세프 대통령절대 우세

  대선 주자는4명으로 좁혀진 상태다. 집권 노동자당(PT)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과제1 야당인 브라질사회민주당(PSDB)의 아에시오 네베스 연방상원의원, 브라질사회당(PSB)의 에두아르도 캄포스 페르남부코 주지사와 마리나 실바 전 연방상원의원 등이다. 브라질사회당은 캄포스 주지사와 실바 전 의원 가운데 한 명을 후보로 내세울 예정이다.

  여론조사는 호세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으로 기울고 있다. 호세프 대통령은 현재 거론되는 대선 주자 가운데 누구와 대결해도 승리할 것으로 전망된다.가상 대결에서 예상득표율은 호세프 대통령 40∼43%, 실바 전 의원 15∼16%, 네베스 의원 13∼14%, 캄포스 주지사 7%로 나왔다. 호세프 대통령이 여론조사에서 독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라질 사상 첫 여성대통령이라는 상징성을 안은 호세프 대통령은 정치권의 최고 실력자로 꼽히는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전 대통령(2003~2010년 집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있다. 룰라 전 대통령은 노동자당의 2014년 최우선 과제를 호세프 대통령 재선 성공으로 설정하고 자신이 대선 캠프를 직접 진두 지휘하겠다는 의사까지 밝혔다. 정당 기반도 탄탄한 편이다. 노동자당은 브라질에서 진성 당원이 가장 많은 정당이다. 연방선거법원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당원은 180만 명을 훨씬 넘는다.

  정치 전문가들은 ▲개인 지지율, 국정운영 평가, 예상득표율 등 모든 평가 항목에서 얻고 있는 높은 점수 ▲5%를 밑도는 실업률 ▲야권 분열 등을 호세프 대통령의 강점으로 꼽았다. 반면 ▲2%대에 그치는 낮은 경제성장률 ▲지속적인 물가 상승 압력 ▲대규모 시위 재발 가능성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 여부 등을 재선 위협 요인으로 들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리더십

  브라질의 유명 여론조사업체인다타폴랴(Datafolha) 조사에서 호세프 대통령 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한 긍정평가는 2013년 3월 65%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대중교통요금 인상에 대한 항의가 시작된 6월 초 조사에서는 57%로 떨어졌다.시위가 정부와 정치권의 부패 척결과 정치∙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적 분노로 확산하면서 이루어진 6월 말 조사에서는 30%까지 추락했다.호세프 대통령으로서는2011년 초 집권 이후 맞은최대의 정치적 위기였다.

  전임자인 룰라 전 대통령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룰라 전 대통령은 브라질 사상 최대의 정치권 스캔들로 불리는 멘살라웅(Mensalao) 때문에 심각한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2005년 6월 브라질노동당(PTB) 대표였던 호베르토 제페르손 전 의원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진 이 스캔들은 노동자당이 의회에서 법안 통과를 위해 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룰라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까지 추락했고 한때 탄핵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룰라 전 대통령은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국민에게 직접 지지를 호소하는 방식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나면서 2010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호세프 대통령은시위에서 터져 나온 '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개혁 의제를 선점하는 기민함을 과시하며 재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전-현직 대통령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과정을 비교해 보는 것도흥미로운 일이다.

  

2014년 대선 1차 투표에서 끝날 가능성은

  정치 전문가들은 여론조사 예상득표율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데 주목하면서 호세프 대통령이 1차 투표에서 당선을 확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노동자당 후보는 2002년과 2006년, 2010년 대선에서 세 차례 연속 승리했으나 1차 투표에서 당선을 확정한 적은 한 번도 없다. 2002년과 2006년 대선에서 승리해연임에 성공한 룰라 전 대통령은 두 차례 모두 결선투표를 거쳤다. 호세프 대통령 역시 2010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이겨 노동자당 정권 재창출을 이뤄냈다.2014년 대선에서 호세프 대통령이 노동자당의 대선 도전사에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관련해 룰라 전 대통령의 집권 과정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룰라 전 대통령은지지 계층과 반대 계층이 선명하게 갈리는 인물이다. 룰라 전 대통령을확실하게 지지하는 계층은 30~35%로 분석된다. 그를 반대하는 계층도 비슷한 비율을 차지한다. 룰라 전 대통령의 정치적 성공은 30~40% 부동층의 표심을 움직여 실제 지지로 이끌어냈다는 데 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정치력을 발휘했다는 뜻이다.

  이런점은 룰라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불리는 호세프 대통령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호세프 대통령이기존의 지지기반을 더욱 확실하게 다지면서 반대 계층의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부동층을 지지자로 만드는 정치력을 발휘한다면 재선 성공은 물론 노동자당 후보로는 처음으로 1차 투표에서 당선을 확정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그럼에도 2014년 대선이 결선투표까지 갈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야권에서도 표 결집 현상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범국민적 인기를 누린 룰라 전 대통령도 여론조사에서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였으나 대선 1차 투표 득표율이 과반을 넘기지는 못했다.

  

실용주의로 무장한 노동자당 장기집권 플랜 가동

  노동자당은 2013년 2월 '집권10년' 축하 행사에서 호세프 대통령을 대선 후보로 공식 추대했다. 11월 중순에는 전당대회를 통해 새 지도부를 선출하면서 실용주의 노선을 전면에 내세웠다. 스스로 '좀 더 유연한 좌파'로의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이에 맞춰 이루어진 여론조사에서 노동자당의 집권 연장가능성이 더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자당의 변신 노력을 여론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브라질 의회가 1990년부터 2009년 사이 노동자당을 포함한 11개 주요 정당의 이념적 성향 변화를 조사한 자료가 있다. 이 조사에서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정당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중도 지향적 성향을 나타낸 것을 볼 수 있다. 브라질의 정당들이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과감하게 실용주의를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다.

  브라질은 전형적인 다당제 국가다.2013년 말 현재 연방선거법원에 등록된 정당은 32개에 달한다. 32개 정당 가운데 절반 정도가 노동자당을 정점으로 하는 연립정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연방하원의원은 513명이며 정치적 성향은 여권 406명, 야권 107명으로 분류된다. 여권이 의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자당은 연립정권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중도좌파정권을 연장하기 위한계획을 치밀하게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언젠가 브라질의 유명 정치 마케팅 전문가인 조앙 산타나는 노동자당이 구상하는 2022년까지의 대선 전략을 이렇게 소개했다. 2014년 대선에서 호세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나면 2018년 대선에는 앞에서 말한 브라질사회당의 캄포스 주지사를 후보로 밀고 2022년 대선에는 다시 노동자당 소속인 페르난도 아다지 상파울루 시장을 후보로 내세우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캄포스 주지사가 2014년대선 출마를 고집하면 이런 구도는 허물어지겠지만, 정권 재창출과 집권 연장을 위한 노동자당의 고민을 잠깐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는 내용이다.

  

남미 '좌파 대세론' 확산…중도좌파 비교우위

  호세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남미지역에서 좌파 대세론이 더욱 힘을 받을 것으로 관측된다. 남미 좌파는 1990년대 중반부터 강세를 보이다가 2010년을 전후해 세력이 위축되면서 고비를 맞았다. 그러나 2010년 10월 브라질 대선에서 호세프 대통령의 승리로분위기는 반전됐다. 이후 2011년 6월 페루 대선, 2012년 10월 베네수엘라 대선, 2013년 2월 에콰도르 대선, 2013년 12월 칠레 대선에서 좌파 후보가 잇따라 승리했다.

  현재 남미 주요국 가운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에서 좌파가 집권하고 있다. 칠레에서도 2014년 3월 좌파 정권이 출범한다. 우파 집권 국가는 콜롬비아와 파라과이뿐이다.파라과이는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베네수엘라와 함께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을 구성하고 있다. 메르코수르는 파라과이의 인프라 사업에 6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고, 파라과이 국내총생산(GDP)의 30%는 다른 메르코수르 회원국들과의 통상∙투자에서 나오고 있다.파라과이는 남미의 좌파 대세론을 외면할 수 없는 처지다.

  남미 좌파는 중도좌파와 강경좌파로 나뉜다. 중도좌파를 이끄는 인물은 다름아닌 브라질의 룰라 전 대통령이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과 비중을 또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용주의를 앞세우는 중도좌파의 기운은 브라질 국경을 넘어 인접국으로 갈수록 확산하는 추세다.

  반면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 서거 이후 구심점을 잃은 강경좌파는 정정 불안과 경제난, 사회갈등 요인 폭발 등이 겹치면서 뚜렷한 퇴조 양상을 보이고 있다. 2007년 집권 이후 2011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경제위기 속에 지지율 추락으로 고심하고 있다.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2014년 대선에서 3선에 도전할 계획이나 낮은 지지율 때문에 고민이 크다.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정권은 심각한 경제난 때문에 휘청거리고 있다.

  2014년 브라질 대선이 호세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나면 남미는 여성 대통령 전성시대를 맞게 된다. 아르헨티나(Argentina), 브라질(Brazil), 칠레(Chile) 등 '남미 ABC'의 여성 대통령들이 한 자리에 앉으면 세계적으로도 화제를 낳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