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번역: 박은영(서울대 서어서문학과)

 

면접자 : IIAS교수 헤라르도 고메스 미첼
(2013년 8월 인터뷰)

  

  GGM: 칠레와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운동이 보여준 생명력, 그리고 국가에 대한 대항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칠레의 경우, 특히 2011년의 학생운동의 분출로부터의 상황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SG: 수년 동안 칠레의 사회운동은 마치 그것이 머나먼 과거의 일인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일련의 요인들 때문에 깊은 침체를 겪었습니다. 우선,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시민들을 단순한 소비자로 둔갑시키고 사회의 조직을 파괴하는 경제와 사회의 유형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연대를 개인의 경쟁으로 대체하며 사회조직을 파괴--제거하는 것이 아니라면 소멸시켜가며--합니다. 매우 강력한 또 다른 요인은 독재의 공포에 대한 기억입니다. 적어도 대략 15년동안에는 과도한 부담으로 작용해, 1973년과 유사한 전개를 막으려고 자신들의 요구와 불만의 표현을 자제하는 국민의 자기억제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수 차례에 걸쳐 개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전히 효력을 유지하며 원래의 본질적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1980년 헌법을 중심축으로 하는 독재로부터 물려받은 제도성 그 자체와 같은 요인들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한 표현 가능성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는 노동법과 같은 헌법구성법률과 기타 법 조항들을 더해야 합니다. 또한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협의체 콘세르타시온(1990년에서 2010년 초까지 통치한 온건반독재연합) 정부들 통치하의 20년 동안 전개된 정책들도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의 정책은 사회불만 표현을 억제하는 길을 모색했는데, 이를 위해 직접적인 탄압에서부터 사회운동 지도자들의 새로운 선출에 이르기까지 신자유주의 모델의 통치방식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1년 중반, 신자유주의 체제 자체의 결함 축적은 단순한 학생시위에 그치지 않는 사회저항의 폭발을 야기했습니다. 이 시기로부터 중앙집권주의에 대항한 지방분권주의적이고 지역적인 운동이 마가야네스, 아리카, 칼라마, 아이센, 토코피야, 프레이리나 및 기타 지역들에서 발생했습니다. 대규모 구리광산 노동자들의 파업, 국영기업뿐 아니라 민간기업의 파업, 항만노동자들과 회계담당노동자의 파업. 바다의 민영화에 대항한 어부들과 자신들의 땅과 자치권 회복을 위한 마푸체인들의 시위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정치적 성격의 한 요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2010년 3월에 있었던 콘세르타시온 정부들에서 전통적 우파정부로의 정권교체가 파벌주의적 정책, 인구의 "취약 부문"에 대한 몇몇 소소한 양보 그리고 억압적 수단의 조합을 통한 사회운동 억제에 기반한 모델을 운용하는 방식을 끝장내버렸습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콘세르타시온은 20년 통치기간 중 첫 15년 동안 사회운동을 크게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고전적 우파정권으로의 교체로 이러한 정부형태가 끝나자 사회운동은 전국무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불만과 사회저항이 움트는 것이 이전 10년의 중반부터 감지되기 시작했으므로 이 부활은 2011년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지만, 일단 피노체트 독재와 긴밀히 연관된 전통적 우파가 정권을 잡고 나자 훨씬 더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칠레에 사회운동의 부상으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왔습니다. 연말의 국회의원선거와 대통령선거의 결과와는 별도로 1),, 심각한 결핍과 불평등의 원인인 구조적 요인, 즉 독재시기에 도입되고 1990년부터 현재까지 정부에서 자리를 바꿔온 두 연정에 의해 시행된 신자유주의적 경제 모델에 대한 대응이기 때문에 이 현상은 이후 수년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GGM: 2011년 고전적 우파가 정권을 잡는 바로 그 변화와 함께 2011년의 분출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은 이 정부의 정책운용의 실수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전술적 차원의 실수라고 보십니까? 즉, 바로 우파정부와 함께 이 분출이 시작되게끔 만든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SG: 정부의 교체 이외에는 특별히 학생운동의 개시를 야기할 일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특히 칠레의 교육이 가진 "시장의" 특징들이 가계부채와 같은 약한 고리를 통해 심화되어 발생했습니다. 고통의 축적과 사회운동의 억제에 대한 노련한 운용에 의존하던 연합정부(콘세르타시온)가 물러나며 나타난 정치적 기회가 함께 작용한 결과입니다. 새 정부(피녜라)는 그러한 억제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다름아닌 그것이 이유입니다.

  GGM: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과 그들의 무상공교육 요구와 함께 일어나는 사회운동을 억제하기 위한 피녜라 정부의 무능 외에도 칠레 사회 거의 전체에서 깨어나고 있는 공감과 연대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현상과 관련하여 어떤 의견을 주실 수 있습니까?

  SG: 학생들의 요구사항의 이면에는 가계부채 문제가 있습니다. 기초교육, 중등교육, 그리고 무엇보다 대학교육에 비용을 대기 위해 칠레의 가계가 진 어머어마한 빚입니다. 그런 이유로 학생들과 사회 여타부문간의 연계, 그 연관은 매우 명확하고 직접적이었고, 그것은 2011년에 발발한 학생운동이 가장 우호적인 시기에 여론조사에 따르면 약 80%의 시민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에 대해, 정부들의 고전적 대응, 특히 가장 명확히 우파적인 정부들의 대응은 경우에 따라서는 무자비하기도 한, 매우 강력한 진압을 펼치는 것에 있었습니다. 동시에, 현재의 고전적 우파 정부는 학생들의 요구를 왜곡하고 운동을 범죄화하기 위해 언론을 이용했습니다. 언론은 사회저항을 사회질서와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억눌러야 하는 야만적, 범죄적 행위로 보이게 만듭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체제가 약해서 발생합니다. 이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기저에 이 극단적 양극화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심오한 개혁도 그 토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정부들은 작은 양보들을 할 수 있을 테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몇몇 혜택을 줄 수 있을 테지만, 이들이 할 수 없는 것은 모델의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고통을 감수하고 실질적으로 교육에 있어서 이윤을 금지시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모델이 할 수 없는 것은 교육이 국가의 근본적 의무가 되게 하고, 모든 국민을 위한 양질의 교육을 보장하는 것인데, 그것은 칠레에서는 유럽의 국가들만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서도 솔직히 하찮은 액수를 지불하는 기업들에 대한 파격적인 세금 인상을 통한 비용 조달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학생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을,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근본적으로 억압적인 대응을 설명해줍니다. 칠레의 교육모델이 결과적으로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이 모델은 불평등을 생성해내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사회질서를 재생산하고, 부의 분배에 있어 이러한 불평등과 불공정을 재생산해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특부층, 부유층, 중산층, 빈곤층, 극빈층과 인디오 간의 사회분리를 영구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 궁극적 목적입니다. 이것이 그 모델의 본질입니다. 분명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지요.

  GGM: 마지막으로, 사회운동이 직면한 도전들을 생각해볼 때, 칠레의 대학생들을 그 순간에만 별도로 떼어놓지 않고 이러한 운동들과 그 구조적 요구들간의 대륙 내 연대를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으십니까? 이듬해 선거 국면의 멕시코의 "나는 132",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부의 마푸체인들,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들 그리고 그런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단절된 일련의 운동들과 말입니다.

  SG: 분명 그것이 목표입니다. 국제적 연대는 과거에도 존재했기 때문에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1864년과 1870년대 초반 사이에 제1인터내셔널 시기의 유럽 노동운동사를 되짚어보면, 그 시대에는 노동자들간의 국제적 연대가 존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몇몇 유럽국가들에서는 중요한 시위가 전개되는 동안 순전히 선언적인 방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식으로 연대했습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 시위자들에게 돈을 보내고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의 파업파괴자 파견을 막기 위해 결집했습니다.

  이미 우리가 이전의 경험들을 고려하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비슷한 것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멕시코와 아메리카대륙의 다른 국가들에서는 독재를 겪고 있던 그 민중과 노동자들을 향한 강력한 연대의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즉 칠레는 그러한 종류의 행동을 생각하기 전에 혹은 생각하면서, 국내의 사회운동들 간의 그러한 연대의 고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여전히 많은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칠레에서 사회운동을 일깨우는 것이 아직 전국민이나 절대다수를 포함하는 일반화된 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 시작단계에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들 몇몇 분석가들은 이 사회운동의 부흥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데, 2010년 이전에 존재하던 것은 거의 신자유주의가 그 위에 비석을 얹은 무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저항이 매우 지리멸렬하고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2011년에 상황이 바뀌긴 했지만 서로 다른 사회운동들 간의 일반화된 연대의 장을 마주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소심하게 학생운동과 마푸체 운동 간의, 학생운동과 노동자 운동 간의 접근과 협력의 움직임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 중에서 학생들과 연대한 비오비오 지역 항만노동자들의 파업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시간과 지리적 공간에 매우 한정된 현상들입니다. 그러므로, 칠레에 관한 한, 라틴아메리카 차원의 효율적 연대에 이르기 이전에 거처야 할 꽤 긴 구간이 남았습니다.

  GGM: 언젠가 그걸 거칠 수 있길 기대합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세르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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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첼 바첼레트는 12월 15일 두 번째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경쟁상대인 여당후보 에블린 마테이를 큰 격차로 이겼지만 바첼레트가 얻은 총투표수(거의 3백5천표)는 2006년에 얻었던 투표수보다 낮아 전 칠레 유권자수의 25.5%에 불과하다.

  

Sergio Grez Toso 약력
Sergio Grez Toso, la Escuela de Altos Estudios en Ciencias Sociales de París 역사학 박사.

  - 1992년부터 칠레의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교수로 근무함

  - 1994년부터 1997년까지 el Centro de Investigaciones Diego Barros Arana de la Biblioteca Nacional de Santiago de Chile에서 연구원으로 근무

  - 1997년 11월부터 2010년 2월까지 el Museo Nacional Benjamín Vicuña Mackenna , Santiago 에서 관장으로 근무

  - 2005년 3월부터 2009년 3월까지 el Magíster en Historia y Ciencias Sociales de la Universidad ARCIS에서 학과장으로 근무함

  - 현재 칠레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근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