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베로아메리카연구소 ::::

김유현(아르헨티나 비즈 드래곤 한국담당)

얼마 전 콜롬비아 출신의 세계적인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전시회를 보러 갔다.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으로 국내에 소개, 인기를 끌었던 보테로의 작 품들이기에 많은 인파가 올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열기는 그 이상이었기에 놀라웠고 라틴아메리카와 관련해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주변을 곰곰이 돌아보게 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살고 있는 한국에 서도 라틴아메리카의 문화 - 춤, 음식, 음악 등 - 가 많이 정착해 있었고 이제는 그저 먼 나라들이 아니라는 느낌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가지 분야에서는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그건 라틴아메리카 영화였다.

자국에서 찬밥대우 받는 라틴아메리카 영화들
우리나라 영화를 해외에 판매하는 세일즈 회사의 관계자를 만날 때 ‘칸이나 베를린 같은 마켓에서 남미 회사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아요’라는 말을 가장 우선적으로 듣는다. 다시 말해 라틴아메리카 영화를 판매하고 타국 영화를 수입하고자 마켓에 나오는 회사들이 드물다는 이야기이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라틴아메리카 자체에서 영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라틴아메리카 대중문화의 큰 틀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축구’와 ‘텔레노벨라(Telenovela)’이며 특히 텔레노벨라라는 텔레비전 연속극은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영화계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다. 라틴아메리카 어는 곳에서든 텔레비전을 틀면 텔레노벨라를 시청할 수 있다. 권선징악이 뚜렷하고 ‘백마탄 왕자’가 수시로 등장하는 이야기 구조를 지닌 이 텔레비전 장르는 정치 ? 경제적으로 힘든 라틴아메리카의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체험하게 해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더욱이 텔레노벨라는 낮은 제작비로 대중들에게 어필, 큰 수익을 얻을 수 있기에 여론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 TV 네트워크들의 전략적 사업으로 이용돼 많은 자본이 필요하고 위험성이 높은 영화에는 투자가 되지 않고 있다. 이에 라틴아메리카의 젊은 영화 감독들은 해외 자본을 통해 제작의 자구책을 마련하고자 노력하며 완성된 작품들은 주로 유럽의 대형 세일즈 회사들을 통해 전세계에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영화들과의 경쟁으로 판매 순위가 뒷전에 밀려 있어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며 영화 수입에 있어 마켓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수입사들이 인지를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문화적 이질감으로 오는 거부감

우리에게 있어 라틴아메리카는 지리상으로 먼 대륙이기에 그만큼 문화적 차이도 크다. 우선 언어적 문제를 들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스페인어를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는 세 번째로 많은 사용자 수를 나타내며 히스패닉 인구가 날로 증가하는 미국에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언어로 각광받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상황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라틴아메리카와 교역이 증가함에 따라 스페인어의 사용이 늘고 있는 추세이지만 여전히 생소한 언어라는 게 사실이다. 영화도 언어적 문제 때문에 고전한다. 심지어 영화를 가지고 방송국 관계자를 만나면 ‘중국어처럼 억양이 높아 듣는 사람이 편하지 않다. 그래서 시청자들이 다른 채널로 돌릴 수 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렇다면 더빙을 해서 보여주면 되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추가적인 비용 문제와 할리우드 영화에게도 없는 특혜를 라틴아메리카 영화에게 줄 수 있는 명분이 없기에 불가능하다. 또 다른 문제는 문화에 대한 이해적인 부분이다. 외국어를 배우고자 한다면 그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 것처럼 영화에서도 이 같은 내용이 적용된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현 상황 등이 빈번히 전파되지 않고 잘 알지 못해 생활에 밀접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라틴아메리카의 영화들은 대륙이 어떤 아픔을 겪었고 그 고통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숙지하지 못한다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세계 영화계에서 주목 받는 영화들은 대륙의 아픈 역사를 환기시키는 영화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대륙의 아픔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 중에 아르헨티나 군부의 잔인함을 드러낸 루이스 푸엔소 감독의 85년 작 <오피셜 스토리(La historia official)>는 국내에서 89년에 개봉돼 예상 밖에 대성공(서울관객 기준 28,000명)을 거두었다. 일단 영화자체가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고 칸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차지하는 등 국제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그렇다고 영화가 이 상들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성공을 거둔다는 보장은 없다. 이는 혼란한 사회적 상황을 겪고 있었던 우리나라 관객들과 교감 ? 마치 군사정권 시절을 다시 보는 것 같은 환상 - 을 했기에 가능했다. 이 같은 예처럼 영화란 일종의 감정 코드가 비슷하거나 내용이 밀착되어 다가오지 않는다면 성공하기 힘들기에 관객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고전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부족한 시장의 다양성

세계의 영화 관계자들이 놀라듯이 우리나라 영화산업은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1000만이라는 천문학적 관객수가 자주 나오고 감독들은 칸, 베를린, 베니스로 지칭되는 3대 영화제에서 위대한 상들을 수상하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보면 겉보기와는 많이 다르며 그 중에서도 할리우드, 한국의 대작 영화들을 빼놓고 관객들이 다른 영화를 볼 수 있는 다양성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경우도 이 같은 피해를 많이 받고 있다. ‘제3세계’ 영화로 규정되어 있는 라틴아메리카 영화들은 많은 관객들이 찾는 멀티플렉스에서 상영 할 수 없고 대부분 예술 영화관이라 불리는 작은 극장들로 이동, 간판이 오래 걸리지 않으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빨리 잊혀진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극장 상영을 하지 않았을 경우 부가판권 시장 - 케이블 TV, DVD, 공중파, IPTV 등 - 에서 영화를 틀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이기에 단관 개봉이라도 극장 상영을 통해 질적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렇게 돼야만 할리우드 영화와 한국 영화를 제외하고 다른 국가의 영화를 일정 부분 방송해야 한다는 케이블 및 공중파의 쿼터제에 들어갈 수 있고 DVD를 찍어낼 수 있다. 영화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등에서 종종 라틴아메리카 영화들을 볼 수 있고 때론 상을 타기도 하지만 홍보, 상영 빈도수 등에서 다른 영화들에 밀리며 국내 수입영화사들의 호출을 받지 못한 채 대부분 귀향한다. 국내의 유명한 한 영화 평론가는 모 주간지에 ‘작은 영화들은 극장이 아닌 DVD, 케이블 등 부가판권 시장으로 바로 움직여야 한다’고 답답함에 글을 쓴 것을 본적이 있다. 그렇다. 비록 업계 관계자들이 관대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한다 해도 라틴아메리카 등 ‘제 3세계’ 영화들이 부가판권으로 바로 이동할 수만 있다면 이 시장 진출을 위해 전체적으로 따졌을 때 극장보다 부가판권 시장의 수익이 더 크기 때문에 - 무리하게 부채를 안고 극장 상영을 하지 않아도 되며 수입사들이 수익을 낼 수 있게 돼 다음에도 수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대중들은 안방에서 편안하게 라틴아메리카 영화들을 볼 수 있고 예전보다 많은 노출로 거부감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