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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 연구교수)

알렉스 콕스 감독의 영화 《불사신 워커》(원제: Walker, 1987)에 대한 반응은 예외 없이 부정적이다. 19세기 중엽의 니카라과 역사를 다룬 영화에서 느닷없이 자동차가 쓱 지나가고, 영화 말미에는 헬리콥터까지 등장하기 때문에 관객으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19세기 미국의 제국주의 팽창정책이 20세기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영화 초반부부터 의도적으로 삽입된 현대의 총기, 《타임》, 《뉴스위크》, 코카콜라병은 영화적 환상에 찬물을 끼얹는 오브제가 분명하다. 게다가 스토리라인은 당시의 복잡한 역사적 맥락에 대한 지식이 없는 관객들을 배려하지도 않고 전개되며, 무던히도 총질을 해대는 인물들의 독백이나 대사는 선악의 구분조차 명확하지 않아 마치 한 편의 스파게티웨스턴을 보는 듯하다. 유일한 볼거리는 주인공 윌리엄 워커(William Walker, 1824~1860)로 분한 에드 해리스(Ed Harris)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뿐이라는 혹평도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실패작일망정 엉터리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주무대는 1850년대의 중미 니카라과다. 이때는 스페인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라틴아메리카가 대륙에서 국가가 형성되던 시기로, 국경의 경계도 불확실하고 또 각 지방의 토호세력이 갈등을 빚으면서 사회

가 혼란했다. 니카라과도 1838년 중미연방이 해체되고 난 뒤 독립국가로 첫발을 내디뎠지만 농장주가 주축이 된 그라나다(Granada) 지방의 보수파와 상인이 중심이 된 레온(Leon) 지방의 자유파가 국가권력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원래 보수파와 자유파의 대립은 입헌군주제와 공화제, 교회와 국가의 분리문제, 연방제와 중앙집권제 등 신생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정치프로그램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으나 점차 이념적 차이는 흐려지고, 단순한 정파적 대립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니카라과의 경우, 1850년대에 이르면 보수파가 대세를 장악하게 된다. 그러자 레온의 자유파는 그라나다의 보수파를 축출하기 위해 미국에서 윌리엄 워커와 ‘불사신’이라는 이름의 용병들을 고용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때문에 영화에서 워커는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미명으로 침입을 정당화하고, “자유파는 우리의 동지이며, 보수파는 적이다”라면서 “보수파의 아성 그라나다”를 점령한다. 또 워커를 환대하고 지원하는 카스테욘(Castellon)과 무뇨스(Munoz)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바로 레온 출신의 자유파로, 둘 모두 1850년대 초반 니카라과의 대통령을 역임한 자들이다.

역사적 인물 워커는 민주주의라든가 자유라든가 평등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1824년 테네시 주 내쉬빌에서 태어난 워커는 내시빌대학교를 졸업하고 스코틀랜드, 독일, 프랑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박사이자, 언론인이고, 변호사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나, 당시 미국 남부 출신이 대부분 그러하듯, 골수 인종 차별주의자이자 노예제 옹호자였으며, 권력욕의 화신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워커는 사랑하던 연인이 콜레라로 죽자 하느님을 원망하며 밴더빌트의 니카라과 침공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실제로 워커의 약혼녀 엘렌 마틴은 1850년에 사망했으며, 워커를 지원한 미국인은 밴더빌트가 아니라 경쟁자인 모건과 개리슨이었다. 아무튼 워커는 1853년 45명의 대원을 데리고 멕시코를 무단 침범하여 바하칼리포르니아와 소노라를 점령하여 ‘로우 캘리포니아 공화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워커는 한번 맛을 들인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1855년 니카라과를 침공하여 그라나다를 점령하고, 1856년 6월 12일에는 사기극에 불과한 선거를 통해 니카라과 대통령에 취임했다. 니카라과를 미국의 속국으로 만들고자 한 워커는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니카라과 국민의 선거권을 박탈하며, 이미 1824년 폐지한 노예제를 부

활하는 등 시대착오적인 통치행태를 보였다. 이러한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뉴올리언스의 유력 정치인들은 워커를 지원하기 위해서 모금운동을 벌이고 영웅으로 추앙하지만, 인접국 코스타리카를 비롯하여 중미인들은 보수파와 자유파를 가리지 않고 워커를 축출하기 위한 무장 투쟁에 돌입하고, 1857년 5월 1일 미 해군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된다. 본국으로 송환된 워커는 이후에도 두 번이나 니카라과 점령을 시도하다 결국에는 온두라스에서 체포되어 처형되고 만다.

이러한 워커에 대해 역사의 법정은 노략질 해적(filibuster)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비록 고향인 미국의 테네시 주에 세워진 비석에서 보듯이, 극히 일부에서는 워커를 32세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든가 불굴의 신념을 가진 영웅으로 추앙한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대의보다는 작은 이익을 탐하여 역사 속에서 좌충우돌한 총잡이에 지나지 않는다. 《불사신 워커》를 감독한 콕스의 평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워커는 보면 볼수록 나쁜 악당이기 때문에 정상적이고 역사적이고 존경하는 인물을 영화에서 다루듯이 워커를 다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콕스의 생각은 영화 곳곳을 지배한다. 예를 들어, 1855년 6월 29일에 벌어진 리바스 전투 장면을 보자. 워커 일당이 리바스 시가지에 진입했을 때, 지붕에 매복한 니카라과인들이 총을 난사한다. 워커는 뒤를 따르던 부하들이 허수아비처럼 꼬꾸라지는 데도 불구하고 놀라기는커녕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서 앞으로 전진한다. 이러한 워커의 무모한 행위는 “아메리카를 지배하는 것은 하늘이 주신 미국인의 권리”이며, “이웃들을 핍박과 학대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미국인의 의무”이자 미국이라는 ‘국가의 운명’이라는 확신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에서 워커의 무모한 행위는 상당수에 달하는 부하의 희생과 전투의 패배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전투 중에 피아노를 치는 행위만큼이나 그의 침략행위는 터무니없고 엉뚱한 일이다. 그런데 전투에서 패배한 워커는 콜레라라는 뜻밖의 지원병 덕분에 승리자로 기록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다. 이처럼 콕스는 《불사신 워커》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 논리를 철저하게 소극(farce)으로 다룬다. 영화의 어설픈 무대와 대사와 스토리라인만큼이나 ‘미국의 운명’이라는 대의도 중미의 현실에서 보면 황당한 간섭이자 시대착오적인 비극이라는 것을 역사적 인물 워커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영화 《불사신 워커》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혁명 정부를 전복하고자 이른바 ‘콘트라 반군’이라는 게릴라 단체를 지원하던 ‘저강도 전쟁’의 시기에 니카라과 현지에서 제작되었다. 이 시기, 소모사 일가의 오랜 독재와 축재, 수년간에 걸친 내전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니카라과는 다시 한 번 미국의 침략 야욕과 지난한 투쟁을 전개해야 했다. 19세기 미국은 1850년 영국과 맺은 클레이턴 불워(Clayton Bulwer) 조약 때문에 워커를 앞세워 중미를 침략했다면, 20세기 미국은 콘트라 반군을 앞세워 좌우파가 연합한 민족주의 성격의 산디니스타 정권을 위협했다. 워커가 노예제라는 시대착오적인 꿈을 꾸고 있었다면, 레이건은 민주화라는 시대적 대의에 역행하는 불의를 이란콘트라 게이트라는 비열한 방식으로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기도는 영화의 시대착오적인 소품만큼이나 황당한 작태라는게 콕스의 메시지이다.

평범한 분노와 고발보다는 조롱과 희화를 통해서 20세기의 야만을 조명하려고 한 콕스의 시도는, 우디 앨런의 《바나나 공화국》처럼 관객들의 외면으로 철저하게 실패했다. 이 영화가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한 산디니스타 혁명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니카라과 주민들의 헌신적인 협조로 완성된 작품이라는 자못 감동적인 뒷얘기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적 코드를 의도적으로 외면한 《불사신 워커》는 최소한의 평가마저도 받지 못한 채 영화사의 한 귀퉁이에 조용히 묻히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