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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환(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라틴아메리카 영화가 사회의식을 강렬하게 지니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사회, 문화가 엄청나게 다른 격차 또는 이질적인 문화를 함께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문맹이라고 할 수 있다. 진 프랑코에 의하면, 19세기 초반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이 독립한 후에도 19세기 내내 라틴 아메리카 대중의 80%가 구어문화만을 가진 문맹이었다고 한다. 문맹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인종적으로 흑인, 원주민, 메스티소 등 유색인종이었다. 이들은 최근까지도 라틴 아메리카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왔다. 예를 들어, 브라질에서는 1985년 이후에 와서야 문맹자들이 선거권을 가지게 될 정도다.

소수의 엘리트들은 식민지 시대이후 독립 후 초기에는 스페인문화, 19세기말부터는 프랑스 등의 서구 문화를 자기 것으로 하는 유럽 추종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서로 이질적인 문화가 격리된 것이 아니라 두 문화가 함께 섞여있는 혼종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적 양극화 문제 또는 사회정의의 문제도 단순히 사회주의적 계급이론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고 오래된 인종주의의 편견이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다. 위와 같은 사회 문화적 맥락에 의해, 라틴 아메리카 영화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두 흐름사이에 긴장감이 있으면서 서로에게 변화를 주고받는 대화 또는 애매모호함의 미학을 통해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한다. 따라서, 사회비판 또는 현실고발 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더라도 단순한 이분법적 접근이 아니라 미학적 표현 형식에 대해 늘 고민하는 것이 라틴 아메리카 영화의 특징이다.

이런 라틴아메리카 영화와 미학적으로 거의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것이 할리우드 영화이다. 페르난도 솔라나스의 다음 언술이 주목할 만하다. “ 할리우드 영화에는 선인과 악인만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삶의 애매모호함과 단순함, 그리고 인생의 심오하고도 진지한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가벼움과 소영웅주의 그리고 단순하게 원인과 결과로 반복되어지는 영화문법, 할리우드 영화의 이런 요소들이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관객들이 그 영화의 논리에 빠져드는 것은 비극이다. ” 라틴 아메리카 영화는 우리의 삶이 슬픈 일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달콤하기만 하지도 않다는 것을 일깨워줘 오히려 우리에게 힘을 주는 영화라고 할까. 몇 년 전에 보았던 칠레 영화 B-Happy가 생각난다. 사춘기의 소녀가 가난과 몰이해와 범죄로 가득한 불행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아 깊은데 잠재하여 있는 무의식 밑의 진정한 자기를 불러내어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이 과장되거나 획일화된 틀을 비껴가면서 설득력 있게 관객과 교감하는 영화로 기억된다.

영화와 소설, 미술, 연극 등 라틴 아메리카 예술 전반에 걸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는 1950,60년대이다. 바로 그 유명한 라틴 아메리카의 현대 ‘ 붐 ’ 소설이 시작된 것도 50,60년대 이다. 50년대에 들어서면서 식민지시대 이후 지속되어온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정면 도전하는 민족주의의 정치 지형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펼쳐지면서 포퓰리즘의 옷을 입고 피지배계급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포용하게 되고 경제 발전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서 산업사회, 대중사회의 초기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어설픈 코메디 영화에서 벗어나 이때부터 라틴 아메리카 영화가 라틴 아메리카 현실의 현재성을 확보하는 [ 신 영화 운동 ] 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이전에는 가난과 폭력의 현실적 맥락과 단절된 채 작위적 담론이 펼쳐지는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 신 영화 운동 ]으로 이념적인 정체성의 추구와 사회의식이 결합된 작품들을 생산하게 된다.

정체성 추구에서 중요한 것은 유럽지향적인 지식인의 시선이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로 향하였고 은폐된 현실을 폭로하는 데 있었다. [ 신 영화 운동 ]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산업사회로의 진입이 제일 빨랐던 아르헨티나에서 다큐 영화적 실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르헨티나에서 페르난도 비리가 1950년대 중반에 산타 페 다큐멘타리 영화학교를 세운 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 신 영화 운동 ]이었다. [ 신 영화운동 ]이 절정에 이른 것은 1975-1979년 사이에 칠레에서 제작된 파드리시오 구스만의 칠레 전투이다. 1973년에 피노체트 군부의 쿠테타에 의해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인 아옌데 정권은 무너진다. 이 사회주의 성공의 역사를 기억으로 남기고 자한 이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 [ 신 영화 운동 ]은 운동으로서의 힘을 서서히 잃어가게 된다. 아주 혹독하고 잔인한 군부독재의 학살과 억압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 후 80년대 중반이후 부터는 또 다른 성격의 잔인한 시대인 ‘ 신자유주의 체제’가 라틴 아메리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려움과 욕망을 매개로 하여 중산층과 중간계급의 시선을 자기들 보다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기득권계급에의 순응으로 이끌게 된 것이다.

따라서, 80년대 중반 이후의 라틴 아메리카 영화는 달라진 사회적 맥락에 의해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다. 특히 과거의 역사를 회고하더라도 이념에 입각한 직접적 혁명과 투쟁보다는 인간의 기본적 삶의 요구, 즉 평범한 사람들의 인권의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의 1999년 영화 올림포 주차장 ( Garaje Olimpo )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다큐영화적 기법으로 잊혀지기 쉬운 군부독재의 잔인한 학살의 역사를 일상적 디테일에 중점을 두어 증언한다. 그 시각은 평범한 한 학생의 인권이 어떻게 평범한 한 군인/고문자-- 그는 중간계급으로 볼 수 있는데 이들 중간계급이 군부독재에 순응하면서 --에 의해 짓밟히는지를 담담한 시선으로 보여주며 우리에게 이념보다 90년대 이후의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다양하게 중첩되는 삶의 방식에서 인권이 욕망에 대해 우선함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