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석(문화체육관광부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 전문위원)

"가난하지만,
떠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지난 1996년에 타계한 쿠바의 국민 영화 감독인 토마스 구티에레즈 알레아(Tomas Gutierrez Alea) 감독의 명작 ‘저개발의 기억’(Memorias del Subdesarrollo, 1968 : 2009년 3월 ICAIC 창립 50주년을 기념한 쿠바 카마에구이(Camaguey)에서 개최된‘Taller Nacional De La Critica Cinematografica’에서 최고의 극영화로 선정) 이후, 쿠바를 다루거나 쿠바가 배경인, 혹은 쿠바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는 예외없는 법칙이 하나 등장한다. 남는 자와 떠나는 자 바로 그것이다. 훌리오 가르시아 에스피노자(Julio Garcia Espinoza) 의 '왕과 여왕'(La Reina y Rey)도 그렇고 쿠바 출신 재즈 트럼페터‘아르투로 산도발(Arturo Sandoval : 쿠바의 전설적인 밴드 ’이라케레‘(Irakere)의 멤버였으며 현존 최고의 재즈 트럼페터 중 가장 빠른 속사주법의 달인이자 비밥의 개척자인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의 후계자로 인정 받는 아티스트)의 쿠바탈출기를 다뤘던 ’리빙 아바나‘(2001)도 역시 그렇다. 몇해 전 우리에게 쿠바음악 붐을 불러 일으켰던 빔 벤더스의‘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도 따지고 보면 혁명 이후 쿠바를 떠난 쿠바음악인들과 그리고 쿠바에 남겨진(혹은 남은) 쿠바음악에 대한 오마쥬 아니던가.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쿠바혁명 이후 쿠바와 쿠바인들이 감내해야할 숙명인지도 모른다. 1960~70년대의 곤고한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 혁명정신의 시대는 1980년대 구소련의 해체와 동구권의 붕괴로 인한 90년대의 경제난으로 점점 그 빛을 잃어 간다. 어쨌거나 쿠바에서 시간 낭비가 국민적 오락이 된지금, 오로지 자신만의 음악만을 한다는 것은 사치이자 만용을 넘어 생존의 위험에 이르는 일일 것이다.

2005년에 제작된 스페인 출신의 베니토 잠브라노(Benito Zambrano)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인 ‘아바나 블루스’(Habana Blues)는 바로 지금 현재의 쿠바와 쿠바음악, 그것도 라틴음악의 파라다이스 쿠바에서도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치부되는 ‘록과 블루스‘를 연주하는 아티스트들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다루고 있다.

분명 쿠바음악의 메인스트림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Buenavista Social Club)류의 손과 아프로-쿠반(Afro-Cuban) 스타일, 혹은 쿠밥(Cu-Bob)으로 불리우는 팝과 쿠반 재즈가 우성 교배된 음악이었다. ‘아바나 블루스’(Habana Blues)는 바로 그런 우리의 고정관념을 감성과 이성을 교차해가면서 조용하게 바꾸고 있는 작품이다. 록과 블루스, 헤비메탈, 힙합, 랩 등 기존의 쿠바영화에서는 들을수 없는 매우 자본주의적 색채가 강한 음악들이 영화 전편을 흐르고 있는 이 영화는 어쩌면 음악은 있으되 산업은 없는 사회주의 쿠바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인줄 모른다.

영화 내용 역시 아바나의 무명 연주자인 루이와 티토, 두 주인공의 열정과 성공에 대한 집착을 다룬 에피소드이다. 쿠바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음악만을 위해 산다는 것은 한국에서 ‘와이키키 브러더스가 성공하는 것 보다 훨씬 어려운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비슷한 수준의 아티스 트들이 거의 1,000팀이 넘는 쿠바 음악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인 루이와 티토가 스페인 제작자의 눈에 들기 위해 하는 눈물 겨운 노력으로 설명된다.

감독인 베니토 잠브라노는 스페인 출신이지만 쿠바에서 13년을 살았다. 쿠바를 다루었던 전작들과 달리, 그가 살면서 보고 들었던 쿠바는 영화 ‘아바나블루스’(Habana Blues)에서 처럼 그다지 아름답지도 경이롭지도 않다. 올드 아바나(Old Habana)는 여전히 칙칙하고 쿠바인들의 삶은 모든게 불만족스럽고 불편하다. 쿠바음악에 대한 무한한 오마쥬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영화는 감성적이되 절제되어있으며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그 희망은 삭막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매우 실증적인 희망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 주인공인 루이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간다. 아내와 아이들은 미국으로, 동료인 티토는 스페인으로 팔려 간다. 쿠바를 선택한, 쿠바에 남은 루이는 또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러나 “밖에 나가서 돈을 벌려면 나라를 비판해야 한다”는 루이의 대사처럼 영화는 쿠바에 비판적이되 비관적이지 않고, 사랑하되 막연한 희망을 강조하지 않는다. 사실 영화와 상관없이 쿠바의 처연한 현실은 계속될 것이며 그들의 삶은 그다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2006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던 이 영화는 스페인, 프랑스, 쿠바의 합작 영화이다. 어쨌거나 1990년 이후의 중남미영화들은 열악한 제작환경을 돌파하고자 공동제작의 형태로 어려운 영화 현실을 타개해 나간다. 이 영화 역시 자본은 스페인이, 마케팅은 프랑스가 배우와 제작 스탭들은 쿠바가 맡아서 진행했다.

공동제작의 형태는 많은 성공의 사례를 사져다 주었다. 이 영화 역시 스페인영화제와 유럽에서 수 많은 수상을 했으며, 뛰어난 오리지널 필름스코어(Original Film Score)와 스토리텔링, 그리고 전편에 흐르는 언더그라운드 쿠바음악은 이 영화를 관객으로부터 범작의 범주에 머무르는 것을 용납치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를 뛰어나게 만든 가장 큰 요소는 감독이 쿠바와 쿠바음악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관점‘ 바로 그것이다. 그 어떤 영화들보다 이처럼 객관적으로 쿠바를 사랑하는 영화를 만난 적이 있던가. 음악은 있으되 산업은 없는, 아티스트들은 있으되 시스템은 없는 쿠바의 현실은 영화 ‘아바나블루스’(Habana Blues)의 주제이며 소재이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사족(蛇足): 쿠바영화예술산업위원회(ICAIC : Instituto Cubano del Arte e Industrias Cinematograficas)산하 '음향실험그룹‘(GES : Grupo Experimental Sonora del ICAIC)의 참여가 없었다면 이영화는 그저 평범한 범작으로 그쳤을지도 모른다. ‘GES'는 이른바 ’누에바트로바‘, ’누에바칸씨온‘ 운동의 바탕을 제공했으며 70, 80년대 쿠바음악과 영화음악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기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