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희(경희대학교)


2003년 니카라과의 뜨거운 햇살을 떠안고 바라본 수도 마나과의 첫 인상은 물이 풍부한 나라, 물이 샘솟는 도시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1973년 겪은 대지진과 오랜 기간 동안의 내전에 지친 그야말로 낙후된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면서 창을 통해 바라본 마나과의 모습은 공항 근처부터 니카라과 사람들이 경험했던 오래전의 역사적 참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 도로에는 한국과 일본의 중고차들이 다니고, 가끔씩 미국의 서부시대를 연상케 하는 마차들도 지나가곤 했다. 도시인들의 얼굴에는 학창시절부터 들어왔던 중남미 인들의 낙천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먼, 삶 자체가 힘겨움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숙소는 마나구아의 최고 중심지인 외국 대사관저와 부유

층들이 모여 살고 있는 비야 폰따나의 한 별장식 주택이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부유한 동네 뿌에르따 데 이에로의 축소판이라고 할까. 집주인 마리 바라오나의 모습은 유럽여성의 세련됨과 여유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마나구아의 부정적인 첫 인상을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마나과는 주변도시 거주민을 포함해서 약 1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커다란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도시로서 빼어난 자연 경관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처럼 큰 호수에 비친 노을 진 석양의 모습은 그야말로 도시민의 피곤함을 말끔히 씻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시 중심지로부터 승용차로 20분쯤 떨어진 곳에는 지금도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마사야 화산이 있으며,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까딸리나 호수가 있다. 이 호수는 한라산의 백록담을 연상케 한다. 많은 관광객들이 맥주를 마시면서 니카라과 악사들의 전통 악기 연주에 흠뻑 도취된 채 고즈넉한 호수의 풍경에 빠져드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마나과에서 남서쪽으로 1시간 정도 승용차로 달리면 그라나다에 닿을 수 있다. 이곳은 니카라과에서 가장 큰 호수가 있는 곳으로(호수의 명칭도 니카라과 호수이다), 이 호수는 바다처럼 넓어 란차(20명쯤 타는 관광용 배)를 빌려서 호수 주변을 관광하는데, 워낙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보니 중앙에 많은 섬들까지 있다. 작은 섬 마다 화려한 호화 주택이 각각 한 채 씩 위용을 뽐내며 나름대로의 멋을 지니고 있으며 요트들이 이들의 교통수단으로 이용된다. 니카라과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호수에는 길 잃은 황소상어들이 서식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라나다의 또 다른 명소로는 몸바쵸 화산을 들 수 있다. 이곳은 700여종의 특이한 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활화산으로, 출입
구에서 관광용으로 개조된 트럭이 정상까지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데, 산 중턱쯤에서는 친절하게 니카라과 산 커피를 모든 관광객들에게 제공한다.(참고로, 니카라과 커피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품질과 향이 뛰어나 세계적인 커피전문점인 스타 벅스에서도 사용된다고 함) 그러나 촉박한 휴식시간으로 인해 산 정상으로 향하는 흔들리는 트럭 안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셔야만해서 제대로 맛을 음미하지 못해 울상을 짓는 관광객들에게 가이드는 “공짜는 다 그런 거예요” 라고 얄궂게 일침을 가한다.

한편, 북쪽으로 1시간쯤 가면 니카라과 제 2의 도시 레온이 있다. 지진과 내전으로 도시 전체가 얼룩졌지만 여전히 많은 식민지 시대 성당과 관공서들로 빛나는 곳이다. 18세기에 지어진 레온성당은 중미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안토니오 사리아가 그린 거대한 회화작품과 니카라과가 낳은 세계적 문호로, 중남미 모데르니스모의 대부인 루벤 다리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렌다......” 로 시작되는 대학원 시절에 즐겨 읽으면서 가슴이 설레었던 그 시의 주인공 루벤 다리오가 여기에 묻혀 있다니! 니카라과의 영웅 루벤 다리오의 시신 그 자체가 관광객의 명소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문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살짝 흥분 감을 느끼게 된다.
레온성당 바로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니카라과의 전통음식과 맥주를 마시며 고인의 시를 한 번 더 음미함은 나만이 간직할 수 있었던 삶의 행복이 아닐 런지.......

(...)인생은 불가사이한 것, 어두운 빛과
접근하기 어려운 진리는 암울해진다:
번쩍이는 완벽함은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상적인 비밀은 그림자 속에서 죽는다,
그래서 성실함이 강한 것이다.
별은 몸을 드러내어 빛을 발하고,
졸졸졸 흐르는 맑은 목소리로
물은 샘의 영혼을 말한다(...)


니카라과의 전통맥주 또냐에 반쯤 취해 시골풍경을 곁눈질하며 달려간 곳은 바로 포넬로야 해변. 넓게 펼쳐진 백사장, 아름다운 바위벽, 섬 하나 없이 넓디넓은 가없는 수평선, 고요하고 평화로운 바다, 태평양.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사치스런 이 해변을 단 몇 명의 관광객만이 나누어 즐기고 있다니, 오, 해피! 코코넛을 마시며 이 럭셔리한 한가로움을 내가 또 언제 어디서 만끽할 수 있을까.

남쪽 코스타리카와의 국경선 근처에서 서쪽으로 30분쯤 가면 거기에는 니카라과가 자랑하는 해변 산 후안 델 수르가 있다. 니카라과의 최고 해변으로 알려진 이곳은 명성에 걸맞게 많은 숙소가 있었으며 외국 관광객들(대부분 코스타리카 인이라고 함)이 니카라과 최고의 해변을 값싸게 즐기고 있었다. 이곳을 방문한 가장 큰 이유는 우습게도 니카라과 전통음식인 가요 삔또(우리나라의 팥밥 비슷한 것에 계란 부침, 고기, 튀긴 바나나 등이 어우러진 요리)가 유명하기 때문이다. 열정적인 중남미 해변에 식상 했다면 반대쪽에 위치한 바다처럼 넓은 니카라과호수 중앙에 떠있는 오메떼뻬 섬으로 가보는 것도 좋다. 호수의 선착장에 차를 주차시켜놓고, 장엄한 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한 시간쯤
달려가면 만나는 오메떼뻬 섬은 웅장하고 아름답다. 이 섬은 신대륙 발견 이전의 고고학적 유물이 남아 있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거의 매일 한번 씩 쏟아지는 스콜성 소나기는 1년 내내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살고 있는 니카라과 사람들의 답답함을 덜어주고, 시원해진 평원에서 유유히 풀을 뜯는 소들의 한가로움은 삶의 평온함을 일깨워 주는 듯하다. 바로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운 경관들이 이데올로기 전쟁 속에서 고통 받았던 니카라과 인들의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져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니카라과의 여러 곳을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은 다른 중미국가인들(과테말라, 코스타리카, 파나마, 온두라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서도 역시 친절하고 재치 있으며 때로는 익살스런 면들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반면에, 천재지변과 긴 세월의 내전, 경제적인 곤궁, 좌익과 우익으로 양분된 이데올로기적 갈등 속에서 대부분의 니카라과 인들은 검고 반짝이는 커다란 눈으로 내성적이고 조심스럽게 타인과 거리를 유지하려는 묵시적 진지함을 보여주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