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철(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신대륙 발견(또는 만남, 발명, 은폐?) 500주년을 기념하여 1992년을 전후하여 『묻혀진 거울』(푸엔테스),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그래프턴), 『501년, 정복은 계속 된다』(촘스키)와 같은 신대륙에 대한 성찰 및 서구 우월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룬 몇몇 책이 출판되었다. 엔리케 두셀의 『1492년, 타자의 은폐』 역시 이에 맞추어 나온 책이다(실상 이 책은 1991년 두셀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행한 강연록을 모아 만든 책으로서 1994년 볼리비아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잘 알다시피, 두셀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계체제 안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근대성 개념의 주변부 시각을 비판하고 인식론적으로는 탈식민화를 꿈꾸면서 여러 가지 유형의 억압과 빈곤으로 고통 받는 타자의 해방을 추구하는 해방철학의 주창자이다.

 두셀에 따르면 1492년은 유럽에서 근대성이 탄생한 기념비적 해이다. 그는 헤겔의 ‘역사철학강의’를 언급하면서 헤겔이 서술한 세계사에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제외된 것은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다. 두셀은 바로 헤겔의 이런 논점을 비판하면서 근대성의 탄생을 논할 때 스페인만이 15세기말 외부영토를 정복할 힘을 갖춘 유일한 유럽강국이었고 또 유럽 나라중 최초로 주변부(여기서는 라틴아메리카)를 지배하는 중심부의 경험, 다시 말해서, 정복자의 지배를 통해서 피지배 받는 타자를 형성한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근대성의 탄생 과정을 논할 때 스페인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는 헤겔의 역사발전 단계나 변증법적 고찰이 우리의 인식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음을 인정하지만 그가 비유럽세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역사의식의 천박함이나 저열함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헤겔은 심지어, 중국의 역사는 오로지 왕정에 의한, 다시 말해서 왕 한사람을 위한 역사이기 때문에 중국에는 역사가 없다고까지 극언까지 한 사람이다. 그러니 헤겔이 같은 유럽권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세계사 발전단계에서 제외한 것도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헤겔에게 있어 근대적인 것은 철저히 유럽적인 것이다. 이 이상주의 철학자에서 이성적인 것은 절대로 유럽적인 것은 벗어날 수 없으며, 이런 이유로 그의 “시대정신”, 즉 변화에의 의지는 유럽이 식민지를 강압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합법적인 도구가 되는 것이다.

 사이드의 『오리엔털리즘』의 라틴아메리카 다이제스트판이 연상되는 『1492년, 타자의 은폐』는 8강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그리 두툼한 책은 아니다. 1부의 유럽중심주의, 신세계의 발견, 발명, 정복 및 식민화, 2의 근대성 신화의 비판과 비유럽중심적 세계사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디오아메리카, 3부의 침략에서 타자의 발견,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 등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논의의 중심은 아무래도 유일하게 근대성을 이룩한 유럽세계에 비유럽세계(여기서는 아메리카)가 예속되면서 아메리카를 둘러싼 은폐된 근대성의 개념을 다룬 유럽중심주의이다.

 사실 이런 문제 제기는 두셀이 처음으로 주창한 것은 아니다. 토도로프 역시 『아메리카의 정복: 타자의 문제』에서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도래를 인식의 변화나 물질적 발전에서 유럽의 근대성을 이룩하게 한 획기적 사건으로서 간주한다. 두셀과 마찬가지로 토도로프도 이 책을 통해 유럽 근대성의 신화를 비판하고 아메리카 정복의 분석을 통해서 비유럽중심적 비전을 통해서 세계사를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동안 신대륙과 유럽과의 조우는 역사적 사실이나 유럽중심적인 사고, 또는 근대성의 규정이라는 맥락에서 “만남”, “발견”, “발명”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두셀은 이 모든 용어를 뿌리치고 “은폐”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은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한 코르테스의 예로 들면서, 이 정복자는 유럽인 최초로 아메리카라는 타자를 접하고 그들을 정복하면서 근대적 개념의 자아를 형성해 나간 인물로 본다. 그런데 이 ‘정복하는 자아’는 타자의 존재를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근대성과 타자성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유럽 근대성은 무력을 동원한 정복과 강압적인 식민화를 통해서 타자를 동일자로 포섭하였으므로 상징적인 의미의 1492년은 타자의 발견이 아니라 타자의 은폐”가 되는 것이다.

 두셀에 의하면 “만남”이라는 개념은 은폐적이다. 왜냐하면 라틴아메리카나 스페인의 지배 엘리트가 만든 “만남”이라는 용어는 유럽세계와 유럽자아의 타자세계(인디오 세계)에 대한 지배를 교묘히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두 문화 사이의 만남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동등한 자격을 갖춘 만남이 아닌 비대칭적인 관계였으며 타자의 세계는 종교적 타당성이나 합리성으로부터도 배제되었다. 사실 이런 이러한 배제는 원주민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이라는 신학적 논리로 정당화된다. 2부에 등장하는 세풀베다와 라스카사스의 논쟁은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두셀은 유럽과 아메리카 사이에는 어떠한 만남도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왜냐하면 유럽인들은 원주민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없앴기 때문이다. 한편, 두셀은 아메리카는 유럽인들의 상상력, 필요성에 의해서 발명되었다고 하는 오고르만의 주장이 유럽중심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아메리카는 상이한 그 무엇으로 타자로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동일자(아시아인)를 단지 인식한 것뿐으로, 따라서 아메리카인들은 “타자의 출현”이 아니라 “동일자의 투사”이기 때문에 은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유럽중심적이고 발전주의적인 신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두셀은 이에 ‘에필로그’에서, 앞서 언급한 근대성 신화가 부정한 것들을 다시 부정하자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근대성으로 희생되고 부정된 ‘이면’이 무고하다는 것을 밝히고, 폭력을 수반한 ‘문명화 신화’를 부정할 때만이 근대성의 희생제의적 실천의 부당성을 인식할 수 있으며, 해방이성의 본질적인 한계 또한 극복이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서 계몽된 이성의 유럽중심주의를 밝히고, 헤게모니적인 근대화 과정의 발전주의적 오류를 드러낼 때 유럽중심적이고 정치적인 해방이성(razon emancipadora)을 탈유럽중심주의적이고 철학적인 해방이성(razon liberadora)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