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베로아메리카연구소 ::::

박정훈(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라틴아메리카담당)

미국 신정부의 대중남미 외교가 숨 가쁘다. 지난 3월 오바마 대통령이 브라질 룰라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중남미 대륙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더니 4월엔 직접 멕시코를 방문해 마약조직과 전쟁을 치르느라 넋이 나간 깔데론 대통령과 만났다. 오바마 대통령은 최대 마약 소비국이자 마약조직을 무장시키는 불법 무기의 수출국으로서 책임감을 통감한다며 협력을 약속했다. 그 즈음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반세기 동안 유지돼온 미국의 쿠바 봉쇄 정책이 실패했다고 시사했다. 그 발언과 함께 미국은 쿠바계 이민자들에 대한 본국 여행 제한 및 송금 제한 조처들을 철폐했다. 4월 중순 카리브해 섬나라 뜨리니닷 이 또바고에서 4년 만에 개최된 제5차 미주정상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 모두는 동등한 파트너”라고 신외교 노선을 천명했다. 20세기 내내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패권을 휘두르던 미국 외교의 방향전환을 예상하게 하는 선언이었다. 6월 초에 열린 미주국가기구(OAS) 각료회의에서는 47년 만에 쿠바에 대한 회원국 자격 정지 결정을 철회했다. 회원국 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주국가기구 설립 취지를 준수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1962년에 내린 결정이 철회된 것은 냉전의 마지막 유산(미국의 대쿠바 봉쇄)을 철폐하는 관문이 열린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마바 행정부의 일련의 발언과 조치는 라틴아메리카 대륙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동시에 지난 10년간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축소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10년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간 이 대륙에서는 민주선거에서 승리한 좌파 정부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1999년 베네수엘라 한 곳에 불과했던 좌파 정부의 수는 10년이 흐른 현재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을 비롯해 총 11개국으로 급증했다. 중남미 대륙의 정치적 좌회전이 뚜렷해지면서 중남미 통합 운동도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통합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이들 좌파 정부들이 라틴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의 이상을 품었던 시몬 볼리바르, 중남미 대륙 곳곳에서 벌어질 게릴라 연쇄 혁명을 꿈꾼 체 게바라의 후예들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먼저 1980년대의 외채위기와 1990년대의 외환위기 시대 중남미 대륙의 경제는 사실상 성장을 멈추었다.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그 시대에 적극적으로 추진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중남미 국가들의 경제를 세계 경제의 변화에 아주 민감한 체질로 변화시켰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기구의 정책이 중남미 각국의 경제주권을 대체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게다가 미국은 1994년에 제1차 미주정상회의를 개최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대륙 전체로 확장하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미국에 의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면화로 간주됐다. 좌파 정부들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경제적 권익을 방어하기 위해 역내 국가들의 경제협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중남미 국가들은 지역 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국제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냉전 시대 ‘미국의 뒷마당’으로 불리던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주요 사건들은 미국의 개입(그것이 직접개입이든 간접이든, 정치적 개입이든 군사적 개입이든지 간에)에 의해 해결되었다. 가령, 미국 주도로 조직된 미주국가기구(OAS)는 1962년 혁명 쿠바가 공산주의 진영과 동맹을 맺자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켰으며, 1965년 미국이 도미니카 공화국을 침공했을 때는 이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반공친미노선을 여실히 보여줬다. 냉전 붕괴 이후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하고 집권에 이른 중남미 좌파는 라틴아메리카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통합운동의 대의에는 모두 동조했지만, 운동의 방향을 놓고 크게 둘로 나뉘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반미 친쿠바 노선을 선명하게 내건 급진주의 외교 노선을 채택했다. 특히 2002년 4월 베네수엘라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극우파가 주도하는 임시정부를 미국이 즉각 승인하는 것을 보고는 본격적인 반미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2004년 아바나에서는 쿠바와 함께 ‘미주볼리바르대안(ALBA, 서어약어)’이라는 통합운동을 제안했다. 이것은 미국 주도의 미주자유무역지대(ALCA, 서어약어) 구상 자체를 반대하는 라틴아메리카 좌파 국가들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상호 교류의 새 원칙으로 연대교류(유무상통의 원리에 따른 국가간 교류로 베네수엘라가 석유에너지를 제공하고 쿠바가 의사들의 의료서비스로 상환한 것이 그 예이다)원칙을 수립하고, 교류 분야도 무역에서 정치, 사회, 문화 전 분야로 확대하고자 했다. 현재 볼리비아, 니카라과, 온두라스, 에콰도르 등이 참가해 중남미 통합운동 내부의 좌파 블록으로 자리 잡았다. 이 블록이 수행한 외교전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2005년 아르헨티나에서 제4차 미주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회의에서는 미국 주도의 미주자유무역지대 구상이 실질적으로 좌초된 역사적인 자리였다. 그때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정상회담장의 마이크를 잡는 대신에 정상회의 반대 집회의 무대에 올라 미주자유무역지대를 매장시키자고 역설했다. 지난 4월 개최된 제5차 정상회의에서도 이 블록의 입장은 주목을 끌었다. 최종합의문에 쿠바 봉쇄 정책에 대한 비판이 빠졌다는 이유로 서명을 거부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차베스 대통령은 신임 미국 대통령에게 스페인어판 ‘수탈된 대지’를 선물하며 화해 가능성을 타진하기는 했다. 반면,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멕시코와 콜롬비아, 페루 등 우파 정부들도 포함하는 지역 통합 블록을 지향하고 있다. 룰라는 ‘미주볼리바르대안’ 소속 국가들과도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우파 정부들과도 지속적으로 협력하면서 양측 사이의 가교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는 전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 2세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통합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룰라 정부의 외교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룰라 정부는 미국 주도해온 미주자유무역지대 구상을 그 내부에서 좌초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룰라와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들은 미국이 상대국에게 강요하는 것을 먼저 이행한다면(가령, 농업보조금 철폐), 미주자유무역지대에 참가할 의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는 온건한 좌파 정부들의 입장도 수용하지 않았다.

룰라 정부는 지역통합을 목표로 하는 국제기구 건설을 주도해왔다. 첫째, 남미 12개국 전체가 참가하는 남미국가연합(UNASUR)의 결성에 앞장섰다. 2008년, 4년간의 논의 끝에 출범한 이 통합기구는 남미국가들의 집단방위체제를 수립하고, 남미공동은행을 설립할 것을 결의했다. 둘째, 2008년 말 브라질에서는 라틴아메리카 22개국이 참가한 리우 그룹 회의가 개최되었다. 같은 장소에서 연이어 사상 최초로 라틴아메리카·카리브 정상회의도 열렸다. 브라질 정부는 이 정상회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33개국 정상들에게 초청장을 보낸 것은 물론이고 브라질 정부가 공군 소속 비행기까지 보내 카리브와 중미 정상들을 싣고 왔다. 페루와 콜롬비아 2개국이 빠져 총 31개국이 모인 자리였지만, 이 두 국제회의는 아주 특별한 행사였다. 무엇보다도 1962년 이래 미주 대륙의 모든 주요 국제회의에서 배제된 쿠바가 처음으로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쿠바는 브라질 정부의 설득 끝에 리우 그룹의 공식 참가국이 되었다. 멕시코 대통령 펠리페 깔데론은 최근 신종 인플루엔자 대처 문제를 두고 쿠바와 설전을 벌였는데도, 쿠바를 “형제국”으로 소개해 참가국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리우 그룹과 라틴아메리카·카리브 정상회의를 통합해 2010년까지 단일 기구를 건설하자는 제안이 29개국의 찬성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됐다. 이 제안이 현실화된다면, 중남미 모든 국가들이 미국과 유럽(특히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개입 없이 독자적인 국제기구를 결성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국제기구의 명칭을 놓고 두 가지 제안이 경쟁하고 있다. 하나는 미국 주도의 미주국가기구에 맞서는 라틴아메리카·카리브 국가기구로 부르자는 입장이다. 미주볼리바르대안 소속 국가들이 지지하는 이 입장은 미주국가기구의 해체도 주장하고 있다. 이 입장을 지지하기 때문에 쿠바는 미주국가기구의 회원국이 될 기회를 제공했지만 복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다른 안은 이 기구의 이름을 유럽연합 모델을 지향하는 라틴아메리카·카리브 연합으로 하자는 것이다. 브라질의 룰라 정부는 이 안으로 대륙 내 다양한 우파정부들을 설득하고자 한다.

한편, 라틴아메리카 통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부시 행정부(2001~2009)의 대중남미 외교는 구시대적 개입과 무기력한 방관 사이에서 표류했다. 집권 초부터 냉전 시대의 인물들을 중남미 담당자로 임명했고, 쿠바 봉쇄 정책을 완화하기는커녕 더욱 강화시켰으며,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중남미의 격변을 무기력하게 지켜만 보았다.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에 중남미 국가들은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국제원자재 가격 덕분에 2003년에서 2008년까지 연속 평균 5%대를 상회하는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실로 40년 만에 찾아온 연속 호황이라는 진단도 나왔다. 그 호황기에 중남미 나라들은 미국에서 벗어나 중국, 인도, 러시아, 이란 등의 나라들과 협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두 번째 독립의 바람이 불고 있다. 사상 최초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통합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기구의 출범도 앞두고 있다. 게다가 2010년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독립 2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니 무엇인가 기념하기를 참 좋아하는 이 대륙 사람들의 특성상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제 더 이상 그 어느 나라의 뒷마당도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볼거리가 될 것이다. 물론 그 기념식은 중남미 통합운동의 새 출발을 다짐하는 자리이지 실질적인 결실을 향유하는 자리가 아니다. 다소 성급한 질문이긴 하지만, 통합운동의 향배는 어떨까? 한 가지를 상상해볼 수는 있다. 현재 미국은 쿠바가 몇 가지의 양보 조치(가령, 반체제 정치범 석방 등)를 취하기만 한다면 근 50년 묵은 금수조처도 해제할 의향이 있는 것 같다. 아메리카 대륙을 짓누르던 냉전 시대의 마지막 유물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만약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때도 차베스의 반미 독설이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