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호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장/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지난 4월 17-19일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트리니다드 토바고(T&T)에서 열린 제 5차 미주 정상회의(Summit of the Americas)는 미국과 중남미국가들간의 관계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쿠바를 제외한 미주국가 34개국 지도자들이 1994년 12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주도로 마이애미에서 첫 회의를 가진지 15년이 지난 오늘날 앞으로도 이 회의가 지속될지 의문도 제기되고 있지만 분명 이번 회의는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미주정상회의는 마이애미에서 2005년을 목표로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출범에 합의하여 한동안 역내 무역정책을 중심의제로 다루었다. 그러나 미국의 농업보조금, 브라질의 지적재산권 보호문제, 약소국에 대한 무역보상 등 각국의 첨예한 이해대립으로 말미암아 FTAA 협상은 난항을 거듭한 끝에 2005년 타결 목표는 지켜지지 않았고, FTAA는 이미 참가국들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거의 잊혀진 상태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나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도 그렇듯이 미주정상회의는 그후 정치적, 의전적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이렇듯 초점을 잃은 미주정상회의는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회의결과에 대한 평가도 제각각이다. 한 때 정상회의와 연계된 행사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기업인들과 사회운동가들은, 이미 미주정상회의가 34개국 정상들이 제각기 자기 주장과 논리를 내세우는 정치 선전장으로 전락했다고 평한다. 특히 2005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렸던 제 4차 미주정상회의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아르헨티나의 네스토르 키르츠네르 대통령이 휘젓는 반미, 반FTA, 반세계화 한마당이었다. 또 미주정상회의에서는 간혹 정상회의 선언문이 주최국의 노력으로 회의결과물로서 채택되곤 했지만 형식에 그쳤을 뿐이지 진지한 후속노력은 뒤따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21쪽 자리 선언문(Declaration)이 나왔지만 쿠바참가를 촉구하는 일부 국가들의 서명 거부 등 논란을 거듭한 끝에 주최측인 T&T의 패트릭 매닝(Patrick Manning) 총리가 대표로 단독 서명해 합의여부도 불투명해졌다.

따라서 미주정상회의를 분석하는 적절한 방법론이 있다면, 이는 회의 시기의 국제 정세를 통해 그 의미를 고찰하고 향후 추이를 전망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5차 정상회의를 앞두고 펼쳐진 국제정세의 핵심은 미국발 국제금융위기와 버락 오마마 미 대통령의 출현이었다. 오바마에게는 정치 및 경제면에서추락해온 미국의 미주지역 내 지도력을 회복해야하는 과제가 주어져 있었다. 이 점에서 정상회의에 주제를 단다면 “미-중남미관계의 오늘과 내일”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세션들의 제목을 붙힌다면 “쇠락하는 미국의 경제적 지위와 대책,” “오바마와 부시의 미주외교 어떻게 다른가”라고 정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듯 싶다. 회의 결과는, 첫 세션은 큰 기대도 없었듯이 청중들의 호응을 살 만한 내용이 발표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세션에서는 기대 섞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그 여파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먼저 경제분야가 새로울 수 없었던 것 이유 중 하나는 지난 4월초 세계금융위기를 배경으로 모인 런던 G-20 정상회의에서 미주회의 참가 34개국 중 미국, 캐나다,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 주요 5개국 정상이 이미 자리를 함께 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중남미 국가들이 미국에 기대한 것은 세계금융위기와 함께 찾아온 중남미의 경제난 즉, 재원조달난, 원자재 가격 하락, 저성장 등으로부터 탈출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약속과 조치였다. 더욱이 최근 중국은 미국 경제난으로 발생한 경제적 파워 공백을 메우며 미국의 영향력을 위협하고 있어 미국으로서도 대응이 필요했다. 중국은 미주정상회의를 전후한 몇 주간 동안만 해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브라질에 대해 대두, 철광석, 원유 등 장기 자원수급책의 하나로 330억 달러 상당의 개발금융 지원을 약속한 터였다.

반면, 미국의 연방준비은행(FRB)은 금융위기 초기 한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나라의 중앙은행과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왑협정을 체결하여 통화안정화를 지원하면서 정작 중남미지역에는 멕시코와 브라질에게만 그 길을 열어주었다.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다른 여러 중남미 국가의 스왑협정 체결요청은 거절했었다. 오바마 정부가 이번 미주정상회의에 가져간 경제적 약속은 소규모금융성장기금(Microfinance Growth Fund), 미주에너지기후파트너십(Energy and Climate Partnership), 국제통화기금(IMF)과 미주개발은행(IDB)을 통한 금융지원 확대 등이었다. 때마침 멕시코가 470억 달러, 콜롬비아가 100억 달러 금융지원을 IMF에 요청해 미국의 적절한 대응이 돋보이는 듯 했지만 미국의 1천억 달러 출연에 못지 않게 브라질도 450억 달러 대출의사를 발표해 무색해졌다. 미국은 IDB의 3배 증자 및 올해 금융지원규모 180억 달러로의 증액을 발표했지만 많은 중남미 국가들은 까다로운 관련 협상으로 인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브라질의 일간 에스타도 데 상파울루는 중남미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인 “금융지원 규모가 지난해 미국 의회를 통과한 은행구제금융 7천억 달러의 0.028%에 불과하다”고 비꼬았다고 한다.

사실 자국 내 불 끄기에도 급급한 미국이 금융지원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중남미국가들은 통상면에서 미국이 전향적인 입장을 취해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와의 자유무역협정(FTA)도 계류상태이지만 콜롬비아 및 파나마와의 FTA의 의회 비준을 남겨놓고 있다. 이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은 원칙적인 노력의사를 표명하는데 그쳤을 뿐이다. 브라질산 에탄올에 대해 매기는 고관세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인하계획을 밝히지 않아 민주당 출신 대통령의 신 보호주의 경향에 대한 중남미 지도자들의 의혹을 불식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경제외교에서와는 달리 정치적 측면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대중남미 외교 관계 전환에 성공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세계를 ‘적과 동지’로 획일적으로 구분하는 네오콘 부시대통령의 흑백논리 외교정책은 중남미의 좌파정권 출현과 함께 상승작용을 불러일으키면서 미-중남미 정치관계를 악화시켜왔다. 더욱이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와는 대사 맞추방으로 지난해 9월 외교관계가 중단되기도 했다. 정치면에서의 과제는 실로 산적해있었다.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멕시코, 마약, 이민 등. 제 5차 미주정상회의는 이들 문제의 해결 방향과 접근법을 확인하는데 의미가 있었다고 평가된다.

즉, 오바마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이미 유세 당시부터 그간의 쿠바봉쇄정책이 결코 쿠바에 민주주의를 회복시키지 못했으며 오히려 중남미의 반미 전선을 강화시키는 구실이 되었음을 직시하고 있었다. 오바마는 집권 직후 쿠바에 대해 유화 제스처를 취했고 여행제한, 송금제한을 해제하고 통신개방을 제시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궁극적인 대쿠바 봉쇄해제의 조건으로 정치범 석방과 인권존중, 민주주의 회복을 주장한 면에서는 과거 행정부들과 큰 차이가 없을 지 모르나, 오바마의 이같은 실리적 접근법은 비타협적인 그간의 미국의 태도에 식상한 중남미 국가들의 불신을 불식시키는데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미주정상회의에 이어 6월 온두라스의 산 페드로 술라에서 열린 미주기구(OAS) 총회에서 미국은 쿠바의 OAS 복귀를 촉구하는 중남미 국가들의 요구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대신 OAS의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조건을 달아 1962년 취해진 쿠바에 대한 자격정지 결정 철회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도록 허용했다. 쿠바는 최근 OAS 복귀를 거부했지만 즉, ‘공’은 여전히 쿠바쪽에 남겨져 있는 셈이다.

미국의 적성국가라면 쿠바든, 리비아든, 이란이든 지지를 표명하고 지난해 9월 볼리비아가 대미 외교관계를 중단하자 이에 동참했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도 미주정상회의에서 오바마와 화해하는 제스처들을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은 외교관계 복원을 약속했고, 결국 양국 정부는 이를 공식화하여 6월 25일 미국 대사 패트릭 더디(Patrick Duddy)와 베네수엘라 대사 베르나르도 알바레스(Bernardo Alvarez)의 카라카스와 워싱턴 복귀에 합의함으로써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 지난해 9월 차베스는 모랄레스와의 동맹차원에서 미 대사를 추방했고, 미국은 이에 응수해 베네수엘라 대사 추방과 함께 콜롬비아 반군에 재정지원을 한 혐의로 차베스의 막료 3명의 재산을 동결시켰었다. 이 글을 집필하는 시간에 발생한 온두라스 쿠데타를 놓고 차베스는 미국이 배후에 있다고 평해 미-베네수엘라 관계개선에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베네수엘라 총수출의 48.8%가 미국시장으로 향하고 미국의 베네수엘라산 원유 의존도가 큰 만큼 경제적 논리를 무시한 양국의 외교행보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마약 이민 문제를 둘러싼 볼리비아나 멕시코와의 외교 문제 등은 앞으로 풀어 가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모랄레스는 지난해 9월 필립 골드버그(Philip Goldberg) 미국대사를 야권인사들과의 반란음모 혐의로 추방시켰고 미국도 볼리비아 대사 추방으로 응수했으며 다시 모랄레스는 11월초 미 마약단속청(DEA) 및 국제개발청(USAID) 요원들을 쿠데타 모의 가담 혐의로 추방시켰다. 미국은 이에 12월 15일 기해 볼리비아를 안데스무역특혜 및 마약퇴치법(ATPDEA) 수혜국 명단에서 삭제했다. 이는 볼리비아에 수출의 13%에 해당하는 6천7백만 달러의 손실을 의미하고 2만5천명의 직접적인 일자리와 약 10만명의 간접적인 일자리가 걸린 문제였다. 미국 정부의 수입관세 면제 혜택이 중단되면서 볼리비아는 의류원단과 목재 및 가죽 제품, 유기농 제품 등의 대미 수출 감소로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랄레스는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미 대결구도를 당분간 유지시키려는 인상이다. 또한 멕시코와의 마약, 불법이민 대책에 있어서 수요자와 공급자 측면을 달리 보는 각자의 시각 차이를 좁히는데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제 5차 미주정상회의는 미-중남미간 불신의 폭을 좁히고 관계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 데 의의가 있었다고 평가된다. 오바마 대통령의 집권 초기에 그가 중남미의 현실과, 중국 및 러시아 등 다른 나라들이 중남미에 증대시키고 있는 영향력을 직시할 기회를 갖게 된 점은 향후 미-중남미관계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하리라 본다. 다만 오바마의 대중남미 관계회복 노력이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 회복으로 이어질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미주정상회의를 앞두고 이루어진 미국-브라질간의 입장 조율과 긴밀한 협의에서 보듯이, 미주지역 국제관계는 ‘미국 주도’로부터 ‘파워공백’시기를 거쳐 ‘미국-브라질 조정(coordinaton)’ 시대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