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남미지역원 ::::

권기수(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

2008년 12월 16~17일, 브라질 바이아 주의 작은 휴양도시인 코스타 두 사우이페(Costa do Sauipe)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중남미카리브 33개국 정상회의(Mega-summit)가 개최되었다. “중남미 문제는 중남미 스스로 결정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개최된 이번 회의는 중남미카리브 정상이 처음으로 모였다는 점이외도 미국과 유럽을 배제한 첫 정상회의라는 점에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브라질의 일부 언론에서는 이번 정상회의 선언을 1823년 미국의 먼로 대통령이 남북미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거부하는 상호 불간섭 원칙을 선언했던 먼로 독트린과 비교하면서 중남미의 제2의 독립선언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을 불과 한 달 앞두고 개최된 이번 정상회의는 미국의 심기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먼저 정상회의에 미국의 참여를 배제시킨 것은 물론 미주지역에서 미국의 정치력을 대변하는 미주기구(OAS)의 수장을 공식자격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초대해 OAS의 위상을 격하시켰다. 둘째, 쿠바를 리우그룹(Rio Group) 회원국으로 복권시킴으로써 1962년 미주기구(OAS)에서 축출된 이후 처음으로 쿠바가 국제무대에 복귀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셋째,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비롯한 좌파 정상들이 일제히 탈미(脫美)를 외친데 이어 룰라 브라질 대통령도 “중남미카리브지역 정상들은 더 이상 미국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가세했다. 브라질 주도로 개최된 이번 정상회의는 중남미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 감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오바마 신정부 출범이후 중남미와 미국, 특히 브라질과 미국과의 관계가 순탄하지 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역사적으로 브라질과 미국과의 관계는 “강대국의 꿈과 종속의 현실”이라는 말로 정의되곤 했다. 영토, 인구, 경제규모 면에서 대단위 국가인 브라질은 자연스럽게 강대국의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브라질은 미국의 뒷마당에 위치한 개발도상국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강대국의 꿈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은 현실적으로 미국의 절대적인 정치경제적 영향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미국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이에 따라 전통적으로 브라질의 대미(對美) 전략은 미국에게 중요하지만 브라질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쟁점에 대해서는 양보하는 대신 브라질에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미국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또한 브라질은 중남미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강대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1994년부터 개시된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협상은 이 같은 브라질과 미국과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미주 34개국을 아우르는 자유무역지대 건설을 목표로 추진된 FTAA 협상에서 브라질은 협상 초기 무역자유화의 속도 및 범위 등에서 미국과 대립각을 세웠지만 대체로 미국 주도의 FTAA 협상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이에 따라 FTAA 협상은 2002년 제7차 통상장관회의까지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2003년 좌파 성향의 룰라 정권이 들어서며 브라질은 대외정책에서 뚜렷한 정치적 색깔을 내기 시작했다. 룰라 대통령은 집권이후 개도국과의 남-남협력에 주력했다. 이에 따라 카르도주 정부가 대외정책의 우선순위를 두었던 FTAA 협상은 후순위로 밀리게 되었다. 당시 FTAA 협상의 공동 의장국이었던 브라질과 미국은 농업보조금, 반덤핑, 서비스, 지재권 등 일부 쟁점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미국은 FTAA 협상의 신속한 진전을 도모하고 브라질을 압박하기 위해 콜롬비아, 페루, 에콰도르 등과 추가적인 FTA 협상을 추진하는 한편 우루과이와도 FTA 협상을 시도해 남미공동시장(MERCOSUR)을 와해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부시 행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FTAA 협상은 끝내 결렬되었으며, 9/11이후 미국 정부의 중남미에 대한 무관심, 좌파 정부의 득세에 힘을 얻는 반미(反美) 기류는 중남미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급속히 위축시켰다.
룰라 브라질 대통령은 중남미에서 일시적인 미국의 힘의 공백을 이용해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 같은 브라질 정부의 노력은 2004년 12월 유럽통합체의 모델을 본뜬 남미국가공동체(CSN) 창설로 결실을 맺었다. 남미지역에서 브라질의 독주는 오일머니를 무기로 한 베네수엘라의 부상으로 위협받는 듯 했다. 실제로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브라질 주도로 추진되어 오던 남미국가공동체(CSN)를 남미국가연합(UNASUR)으로 대체시키는 등 브라질의 위상을 크게 위협했다.
그러나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국제유가 폭락으로 그간 오일 달러를 발판으로 거침없는 행보를 해오던 차베스 대통령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라질 주도로 개최된 1차 중남미카리브정상회의는 남미지역에서 힘의 추가 다시 브라질로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이번 1차 중남미카리브정상회의의 결과가 암시하듯 오바마 신정부 출범이후 브라질과 미국과의 관계가 대립관계로 발전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최근 미국 신정부의 브라질에 대한 인식과 브라질 외교정책의 변화 조짐에서 찾을 수 있다. 오바마 신정부는 중남미지역에서는 물론 국제무대에서 최근 브라질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고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다. 미국 신정부는 중남미지역에서 브라질이 갖고 있는 중립적이며 균형자적인 위상이 미국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크게 중요하다는 점도 잘 파악하고 있다. 또한 미국 정부는 BRICs 일원으로 부상한 브라질을 유망한 경제협력 파트너로도 주목하고 있다. 특히 오마바 정부는 베네수엘라를 대체할 에너지 협력국으로 대체에너지 강국이자 유망산유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브라질을 주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오바마 정부는 미국의 이해를 크게 저해하지 않는 한 국제무대에서 브라질의 적극적인 리더십을 인정하고, 브라질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가입, 남미국가연합(UNASUR)과 같은 범지역통합체 설립, 아이티, 볼리비아 사태 등에서 브라질의 중재역할 등을 용인하는 보다 전향적인 자세를 견지할 가능성이 높다.
브라질 정부는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미국과의 지나친 대립이 결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중남미지역에서 브라질의 영향력 확대는 미국의 헤게모니를 크게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머물 가능성이 높다. 최근 브라질 정부내에서 외교정책의 변화도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룰라 정부들어 이념지향적 대외정책이 결코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하다는 자성이 일면서 그간 외교정책을 주도해왔던 막스주의자 마르쿠 아루렐리우 가르시아(Marco Aurelio Garcia) 외교보좌관이 강등되고, 외교정책의 컨트롤 타워는 다시 실리주의 외교를 지향하는 외교부(Itamaraty)로 넘어갔다. 따라서 향후 브라질의 대미 정책도 명분보다는 실리에 무게를 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