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오(KIEP)
jokim@kiep.go.kr

20세기 국제체제의 새로운 변화의 중심에는 항상 미국이 중심에 있었고, 21세기 새로운 국제질서 재편에서도 미국의 우월적인 지위는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들이 득세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들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고, 파라그 카나(Farag Khanna)의 저작(Second World)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세계는 주권 국가들과 동맹체들의 치열한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힘(power)에 근거한 일방주의의 연이은 실패와 경제력의 분산, 그리고 대공황에 버금가는 세계경제위기 국면이 팍스아메리카의 지속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
이와 같은 21세기 국제질서의 지각변동에서 중남미지역도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미국의 뒷마당으로 간주되던 중남미지역이 세계경제 및 거시적인 안보의 개념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하면서 역외 국가들의 핵심적인 경쟁무대가 되었다. 즉, 중남미지역의 중요성은 세계경제 성장 및 인구 생존에 필요한 자원과 식량의 공급기지로서, 무한한 소비시장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에 있다. 여기에 변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중남미지역 국가들과 지역동맹체들의 적극적인 화답이 경쟁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중남미지역 국제질서의 재편 특징을 대내외적으로 크게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외적으로 미국의 패권이 도전받고 있다. 이라크 전쟁과 중동지역에 집중된 부시 행정부의 지난 8년간의 대외정책으로 중남미지역에 절대적인 힘의 공백상태가 연출되었다. 정치군사적으로는 물론 통상정책에서 보여준 미국의 미온적인 대처는 새로운 세력들의 진출을 가능케 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적극적인 외교군사적 협력과 주요 경제대국 및 협력체들의 통상관계 긴밀화가 반증하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중남미 좌파정부의 수립과 반미주의 심화, 중남미 주요국의 독자노선 및 지역동맹 강화이다. 1998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Hugo Chavez) 정부를 시작으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2002), 우루과이(2004년), 볼리비아 및 니카라과(2006년), 에콰도르(2007년), 파라과이(2008년)에서 각각 좌파정부가 수립되었다. 정치적 변동이 잦았던 중남미지역에서 좌파의 부상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정책의 실패를 파고든 전략에는 새로운 변화를 원하는 국민들의 욕구가 담겨 있었다. 좌파정부의 정책적 성향은
실용주의를 표방한 브라질 유형과 반미 및 제3의 길을 내건 베네수엘라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지향점은 국가 및 지역의 독립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민족주의에 있다.

부시 정부는 대외정책에서 중남미를 차순위에서도 배제함으로써 미주에서 패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관심과 더불어 쿠바, 베네수엘라 등에서의 일방적이면서도 부적절한 것으로 평가되는 개입의 결과는 중남미지역에서 반미주의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비록 콜롬비아 및 멕시코와의 관계는 다소 긴밀해진 측면이 있지만, 콜롬비아-베네수엘라 사례처럼 주변국 간의 불화를 조성하는데 일조한 측면도 있다.
이러한 가운데 오바마(Barak Obama) 새 정부에 대해 국내외적으로 높은 기대감이 조성되고, 미국과 중남미 관계에 대한 새로운 변화를 예상하는 전망들이 쏟아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나타났던 미국 민주당 정부와 중남미지역간의 관계 개선 사례가 이러한 기대와 전망을 가능케 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도 2008년 5월 쿠바계미국인전국재단(Cuban American National Foundation)에서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의 선린정책(Good Neighbor Policy)을 연상시키는 미주를 위한 새로운 파트너쉽(A New Partnership
for the Americas)계획을 제시하였다. 정치적 자유/민주주의, 공포로부터의 자유/안보, 결핍으로부터의 자유/기회라는 3대 자유정책을 통하여 오만과 힘을 앞세웠던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외교정책을 상호존중, 협력, 자결을 원리에 입각한 정책으로 전환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특히 반미의 선봉인 베네수엘라와 쿠바와의 대화와 협력 가능성도 시사하여 대통령 당선 확정 직후 중남미지역 좌파 정부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의 대중남미 외교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약화된 입지를 회복하고, 미국의 국익을 보호하며, 주도권을 강화해 나간다는 점에서는 부시 행정부와 근본적으로 같을 것이다. 다만 방법에서 있어서 다자주의와 무력이 아닌 대화를 선호할 것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및 소련 견제, 에너지, 마약, 이민, 통합 등 지역 이슈와 관련해서는 상당한 진통이 예상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는 반미주의를 통하여 대외정책이나 대내정책에서 성공()을 거둔 사례로 보인다.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중국, 러시아 등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있거나 경쟁국으로 평가되는 국가와의 협력관계를 강화함으로써 대립적인 미국과의 관계를 보완하고 있다. 또한 미국이 주도하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에 반대하면서 풍부한 석유자원을 활용하여 중남미 역내통합 주도권을 경쟁자인 브라질과 양분하고 있고, OPEC을 통해 국제석유시장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반미주의와 민족주의를 통하여 반대파를 견제함으로서 장기 집권에 성공하고 있다.
이처럼 불편한 양국 관계가 오바마 새 정부 출범과 더불어 해빙의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차베스 정부의 반미주의가 실질적으로는 반 부시 성향에서 비롯되었다는 점과 오바마가 부시와는 달리 주권존중, 평등, 진정한 협력을 추구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차베스-오바마 관계 개선 전망은 현재 양국이 처한 사정으로 인하여 대화와 협력 이상의 묘수가 없다는 점이다. 석유산업에 의존해 온 차베스 정부는 세계경제위기로 인하여 대내외적으로 위협받고 있고, 미국은 석유 수입의 상당 부분을 베네수엘라에
의존하고 있는 가운데 중남미지역에서의 입지 회복을 위해서는 베네수엘라의 영향력이 작용하는 중남미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에 베네수엘라의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베스-오바마의 관계 개선에는 분명히 극복해야할 걸림돌이 존재한다. 첫째, 차베스 정부와의 대화 가능성 표명에도 불구하고 오바마는 차베스의 변화를 주문하고 있다. 미주를 위한 새로운 파트너쉽에서 멕시코, 콜롬비아, 브라질은 동맹으로 포함하지만, 좌파 정부들은 여전히 포함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민주주의적 변화를 모색하는 국가와의 협력을 강조하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즉, 2009년 2월 국민투표를 통하여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준비 중인 차베스에게는 부담이 되는 점이다. 둘째, 중남미지역에
대한 여행 경험도 없는 오바마로서는 정책구상에서 보수적인 대외정책팀에 의존할 것이라는 점이다. 미주를 위한 새로운 파트너쉽도 전통적인 패권정치와의 수사적 결별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이를 뒷받침한다. 셋째, 미국의 가치에 반하는 베네수엘라의 대외정책이다. 그 사례로서 오바마는 2008년 5월 콜롬비아혁명군(FARC)을 지원하는 중남미 국가들은 고립되어야 함을 강조한 바 있다. 즉, Marxist Narco-terrorists로 규정되는 FARC를 지원하는 국가는 국제적으로 비난받고,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하며, 강력한 제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미국은
콜롬비아의 대대적인 FARC 소탕전 이후 베네수엘라 및 에콰도르의 FARC 지원을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차베스의 반미주의 기치는 오바마의 정책 방향에 따라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사적인 대화와 협력보다는 진정성이 담보된 대외정책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사례로써 베네수엘라는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잠정 중단하면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자치구 공격에 대한 오바마의 입장이 무엇인지 반문하고 있다. 미국의 일방적 대외정책이 중남미지역에서 지속될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