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베로아메리카연구소 ::::

이상현(중남미지역원 HK교수)

2010년 3월 11일 세바스티안 피녜라(Sebastián Piñera)는 칠레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공교롭게도 피녜라의 취임식은 앞선 2월 27일 칠레 중부를 강타하여 막대한 재산피해와 다수의 인명피해를 발생시킨 대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진도 6.9의 강력한 여진 속에 치러졌다. 각국에서 온 대통령 취임 축하사절단이 강력한 여진 속에 당황해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TV로 중계된 피녜라의 대통령 취임식은 드라마틱한 장면만큼이나 칠레 정치사에서도 그 의미가 작지 않다.

보수적인 국민혁신당(RN) 출신의 전 상원의원으로 부유한 사업가이자 경제학자인 피녜라의 대통령 취임은 우선 칠레정치에서 20년만의 정권교체를 의미한다. 지금으로부터 20년전인 1990년 중도좌파 성향의 민주연합(Concertación)은 피노체트의 17년 묵은 군부정권을 대체하며 갈망하던 민주화를 이루었다. 이후 민주연합은 3번의 대통령 선거를 잇달아 승리하며 20년을 집권하였다. 민주연합이 집권한 20년 동안 칠레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민주연합은 정치적으로 인권유린과 독재정치로 악명높던 군부정권의 그늘을 차근차근 벗어던지고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강력하고 안정된 제도적 민주주의를 구축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꾸준한 성장을 통하여 구매력 기준으로 국민소득을 3배로 불렸으며 160억불에 육박하는 국가저축을 후임정권에 물려주었다. 민주연합의 성공은 대지진의 와중에 퇴임한 바첼렛 전임대통령의 지지율이 80%를 넘는 것으로도 쉽게 증명된다.

그러면 왜 정권교체가 일어났을까? 몇 가지를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우선은 역설적이게도 앞서 언급한 민주연합의 화려한 성공을 들 수 있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민주연합의 성공은 칠레 유권자들에게 진부함을 안겨다 주었다. 즉 민주연합이 일군 성공으로 안정과 번영을 성취한 칠레의 유권자들은 우파라는 새로운 상품에 대한 모험을 걸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는 민주연합의 후보공천 실패로 인한 자멸을 들 수 있다. 즉 대중적 인기가 높지 않은 따분한 이미지를 가진 전 대통령 프레이(1994-2000)의 대통령 후보 공천은 역동적 이미지를 지닌 사업가 출신의 피녜라와 비교해 볼 때 민주연합의 선거를 망친 가장 큰 이유이다. 이는 피녜라가 결선 투표에서 얻은 득표율이 총 유권자의 43%로 1990년 이래 가장 낮았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즉 다수의 민주연합 지지자들은 단지 선거에 불참하였다. 세 번째 이유로는 피녜라의 성공적 선거전략을 들 수 있다. 민간방송사와 국적항공사 그리고 칠레 최고의 인기 프로축구팀 COLO COLO 등 다수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피녜라의 선거전략은 중도와 통합이었다. 낙태와 동성애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지나치게 보수적인 독립민주당(UDI)와 같은 급진 우파들과 거리를 둔 피녜라는,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민주연합이 추구하던 복지정책의 유지를 약속했으며 반대파를 수용하는 국민통합을 강조하였다. 특히 피노체트 독재의 지속을 물었던 1989년 국민투표에서 반대투표를 하였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서 우파를 피노체트 독재와 동일시하여 거부하는 유권자들을 안심시키려 노력하였다. 결국 피녜라의 집권은 사회와 유권자의 급격한 이념적 변화를 동반하지 않은 단순한 선거의 승리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기반할 때, 피녜라의 집권은 단기적으로 정책기조의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을 전망이다. 우선 피녜라는 본인이 소속된 국민혁명당이나 독립민주당 출신의 정치인 보다는 공공정책전문가와 재계인사들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또한 피녜라는 민영화와 같은 정치적 논란을 야기할 정책보다는 고용 및 생산성 증대에 주력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특히 EIU와 같은 언론에서도 전망하듯이, 노동개혁, 교육개혁과 같이 저항을 불러일으킬 구조조정 정책은 추진한다고 해도 성공하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현재 피녜라 정부의 정책을 가늠할 가장 중요한 변수는 인물도 이념도 아닌 지진이라는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였다. 피녜라 정부 취임 12일전인 2월 27일 진도 8.8의 엄청난 강도로 중부 비오비오 지역 해안을 강타한 지진은 제2의 도시 콘셉시온을 황폐화 시켰으며 백만명 이상의 이재민과 500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또한 지진은 도로, 교량, 교육 및 의료 시설 등 국가기간시설을 파괴함은 물론 수산, 과일, 와인 등 주요 수출산업시설에 타격을 주었다. 정확한 통계는 산출중이지만, 지진의 경제적 피해는 대체로 150억불에서 최대 300억불로 추산되고 있다. 따라서 피녜라 정부는 지진피해 복구를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물론 칠레의 현 상황은 지진피해 복구를 위하여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을 제공해주고 있다. 우선은 전임 정권의 현명한 쓰임새 덕분에 잘 보관되어 있는 100억 달러 이상의 국부펀드의 존재이다. 높은 구리수출가격 덕에 축적된 국부펀드는 외채가 거의 없는 칠레정부의 높은 신용등급과 더불어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며 지진복구를 할 수 있는 유무형의 자산이다. 더불어 칠레경제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구리산업이 지진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는 점 또한 다행스러운 점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제 지진피해 복구와 건실한 경제성장 그리고 안정적인 민주주의 제도의 유지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아직은 증명되지 않은 피녜라와 그 내각의 정치력이 될 것이다. 20년 동안의 연속집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거나 약해지지 않고 여전히 건재한 좌파 야당세력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깨달은 대중들은 새 정부가 범할지도 모를 이념에 기반을 둔 일방적인 독주나 일천한 경험에 따른 아마추어적 실수를 용납할만한 여유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