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두빈(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지구상에서 월드컵에서 가장 많이 우승한 국가, 그래서 ‘축구의 나라’라고 불리는 브라질은 2014년에 자국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 최악의 추락을 맛보았다. 국민 우울증까지 일으켰던 그 추락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되었는데, 그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세대교체’의 실패가 지적되었다. 그와 유사한 상황이 축구장을 떠나 브라질 정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2007년, 64년 만에 브라질이 2014년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된 순간, 전 세계 외신의 TV 카메라 초점은 당시 선정 결과를 듣고 눈물을 흘리던 룰라 전 대통령을 향했다.

 

(출처: Estadão)

 

전형적으로 빈부격차가 만연한 브라질에서 초등학교 과정도 모두 마치지 못하고 13세에 구두닦이로 시작하여 44년간 노동현장과 노동정치의 일선에 섰던 그는 소위 ‘빨갱이’로 분류되던 사람이었다. 그가 지닌 공격적인 노동운동 지도자 이미지 때문에 대선 출마 때마다 매번 대다수의 경제학자, 은행가, 투자가들의 반대와 매스컴의 비우호적인 보도 등으로 실패를 맛보았다. 2002년 대선에 당선되고 나서 항간의 우려와는 달리 중도좌파적인 노선으로 좌우를 아우르는 소통의 정치를 기반으로 단계적인 사회변화를 천명했다.

특히 2003년에 취임하여 2006년 재선을 거쳐 8년 간 룰라 정권이 펼친 정책은 공무원 연금 제도 개혁, 시장 경제주의 채택 외에도 직접적인 사회복지정책(빈민 대상 식량 무상제공, 저소득층 생계비 지원, 노동빈곤층의 임금향상, 미취학 아동 취학을 전제로 한 생계비 지원, 최저임금의 현실화 등)을 통해 실제로 빈곤층이 줄어들고 중산층이 늘어나는 효과를 보였다. 심지어는 전투기 구입비용마저 빈민퇴치기금으로 사용했다. 그가 남긴 명언중 하나는 “왜 부자들을 돕는 것은 투자라고 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고 하는가?”였다. 당연히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포퓰리즘 정치’의 극치라는 비판을 해왔다. 하지만 룰라정권은 1998년 경제위기 때 IMF로부터 빌린 돈을 2005년에 모두 갚고, 이전 정부에 비해 경제 성장률을 2배 이상 신장시켰으며, 일자리를 1,500만 개 이상을 창출해내면서 브라질을 세계 8위 경제국으로 성장시켰다. 2014년 월드컵 자국 개최와 2016년 개회 예정인 하계 올림픽 개최도 모두 룰라 집권 시에 이루어진 일이다.

2010년 퇴임시, 지지율 87%라는 진귀한 기록을 남긴 룰라는 2009년 초에 이미 자신의 정치후계자로 지우마 호세피(Dilma Rousseff) 당시 수석장관을 노동자당의 대선후보로 내세웠고 결국 당선시켰다.

 

(출처: 브라질 대통령궁. 좌로부터 브라질부통령 부인, 부통령, 호세피 대통령, 룰라 전 대통령, 룰라 전 대통령 부인)

 

그는 퇴임 당시에도 계속 거론되고 있는 3선 시도설과 관련, "2014년 대선에 또다시 나서는 일뿐만 아니라 정치활동을 완전히 중단할 것이며, 개헌이 필요한 3선 시도는 터무니없는 가설일 뿐"이라고 밝혔었다. 그리고 후임 대통령에게 “심장에서 우러나는 정치를 하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 최선을 다해 민주주의를 실천하라.”고 당부했었다.

사실 정치활동이 아닌 행정직을 주로 맡아왔던 지우마 현 대통령은 대중에게 지명도가 없던 인물이었다. 단지 주앙 산타나(브라질의 유명 언론인)를 통한 언론 마케팅으로 이름이 조금 알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대선 후보로 선정될 당시에도 여·야당을 물문하고 대다수의 정치인들이 지우마가 지닌 정치가로서의 재능이나 자질과 국정운영능력에 대한 의문을 품어왔다. 그러나 룰라 전 대통령이 달성한 업적과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국민의 지지 앞에서 감히 아무도 반대의견을 내지 못했다. 룰라 역시 지우마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 우려에 대한 소리를 들었지만, 측근들마저 그의 면전에서는 함부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 지우마를 선택한 사람이 룰라인 만큼 그녀가 범하고 있는 실정은 그의 몫이기도 하다. 실제로 지우마에 대한 탄핵여론이 강하게 대두될 때, 룰라는 ‘사춘기 청소년의 잘못은 부모 몫’이라는 표현으로 자신과 지우마 대통령의 관계를 비유한 바 있다.

물론 2009년 대선 당시, 지우마 아닌 당대의 노동자당 실세인 주제 디리세우(José Dirceu)나 안또니우 팔로치(Antonio Palocci)가 룰라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이미 장기집권을 통한 매너리즘과 권력에 취해 부정부패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브라질 헌법은 3선 연임을 금지하고 있지만 대통령직을 물러나고 4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출마할 수 있게 제도적 장치가 되어 있다. 비록 아직은 가설이지만 룰라가 재집권 혹은 위기국면에 정권 재창출의 징검다리로 쓰기 위해 아직 능력도 검증되지 않았지만, 정치인이 아닌 엘리트 행정가, 그리고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후계자로 내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언제라도 자신이 대신 구원투수로 등판할 수 있는 만만한 상대, 그의 표현을 유심히 주목해 보면, 아직 부모 품에 있는 ‘사춘기 청소년’처럼...

브라질 현지에서는 룰라와 그의 뒤를 이은 지우마의 국정운영을 ‘수입 디젤유’과 ‘국산 디젤유’로 운행하는 열차에 비유한다. 수입디젤유는 당시 브라질의 풍부한 광물자원과 콩과 같은 1차산품의 수요를 크게 불러 일으켰던 세계경제성장의 동력을 가리킨다. 중국 등 신흥국의 수요 증가에 따른 불어난 원자재 가격 인상, 즉 수입디젤 연료 덕분에 룰라가 운행한 열차는 사실상 무인조정으로도 운행이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지금의 경제위기는 당시 높은 경제성장이 ‘수입디젤’을 연료로 한 성장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미 예견된 것이라는 시각이다. 이코노미스트지 역시 “자원 가격 강세와 미국의 양적완화가 낳은 유동성 풍년이 만든 브라질 경제 호황이 모두 룰라의 업적으로 채색됐다”고 룰라의 업적을 과장된 것으로 분석한 바 있다. 그야말로 작금의 브라질 경제위기를 바라보는 선진국들의 대체적인 시각은 브라질이 보유한 풍부한 자원이 바로 축복이면서 저주가 되었다는 식이다.

다른 한편으로, 브라질은 ‘국산디젤유’로 비유되는 정치비자금을 통해 연립정권을 구성한 정당들에게 권력과 정치자금을 나눠주면서 정치안정을 보장받았다. 국산디젤의 사용은 바로 브라질 정치의 부정부패의 전형이자 패턴이다. 이런 구태는 룰라 이전의 브라질 정치사에서 수십 년간 이어온 것이고, 브라질 국민이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룰라 정권에서도 당연히 존재했던 부분이다. 문제는 노동자당이 운행한 열차에 넣을 국산디젤유를 페트로브라스(Petrobras) 같은 국영기업에서 지속적으로 너무 많이 빼냈다는 데 있고, 계속적인 정권 재창출이 지상최대의 과제인 노동자당과 권력을 승계한 룰라와 정치개혁이 시급한 지우마 현 대통령이 이런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점이다.

결국에, 필연적이지만 우연한 계기로 밝혀지면서 브라질 경제에 일파만파의 후폭풍을 일으키고 있는 뻬뜨로라웅(Petrolão)1) 부패사건을 수사하는 라바자뚜 작전(Operação Lava Jato)2)이 진행되면서 현직 대통령의 탄핵3)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심지어 군사정권이 다시 일어나 좌파정권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국론분열의 목소리까지 일어나는 심각한 상황까지 일어나고 있다(올해 초, 브라질 서점을 휩쓴 책이 바로 독재자이면서 국부로 칭송받는 ‘제뚤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라는 인물을 재조명한 책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사장을 비롯해서 세 개의 연립정권의 정당들이 지분을 나눠 페트로브라스의 6개 주요 보직을 임명한 사람은 바로 룰라였고, 그 중 몇몇 인사는 바로 지우마가 이사회 의장을 맡아 페트로브라스를 공동 경영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부패 고리’의 시작과 끝에 대한 국민들의 심증은 분명하다.

 

룰라와 노동자당을 단죄하자는 캐리커쳐

 

지우마 호세피 대통령뿐만 아니라, 집권기의 멘살라웅(mensalão) 4)스캔들에 이어 라바자뚜(Lava jato)조사로 점점 대중지지도 하락뿐만 아니라 수사대상으로 자진 출두하여 검찰조사까지 받은 룰라 전 대통령. 그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정치수완을 동원하여 한편으로는 지우마 정권을 변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세력에 대한 반격에 나서고 있다.

사실 현재 작금에 불거진 브라질의 문제는 세계적인 불황과 이전 정부와 연결된 현 정부의 부정부패와 무능함, 그리고 무리한 월드컵 개최에 따른 후폭풍과 노동자당이 장기집권하면서 생긴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섞여 발생한 것이다. 주목해서 볼 점은 이번 사태의 제공자이자 태풍의 핵이라고 볼 수 있는 룰라 전 대통령이 이 모든 사태를 ‘자본주의가 야기한 글로벌 경제위기와 ’사춘기의 딸이 저지른 실수‘를 운운하면서 ’지우마 호세피 대통령의 개인적인 무능‘으로 몰아가는 것 같은 모습이다. 실제로 룰라 전 대통령은 그동안 브라질이 건설해가던 유토피아가 손상되어 개혁이 필요하다는 기치를 꺼내면서, 자신이 창당을 주도했던 노동자당을 이미 노쇠하고 권력에 물든 과거의 유물처럼 취급하고, 자신의 뒤를 이은 지우마 정권의 부패연루 문제와 실정문제에 대해서도 마치 관계가 없는 제3자처럼, 유체이탈의 화법으로 얘기하는 모습이 최근의 행보에서 종종 드러나고 있다.

다른 한편, 호세피 대통령과 룰라 전 대통령이 지닌 리더십의 차이는 소통문화에 있다. 금속노조위원장으로 길거리 운동에 익숙했고 적과 싸울 줄도 타협할 줄도 알았던 룰라에 비하면, 호세피 대통령은 칩거형에 가깝다. 실제로 룰라가 지난 7월에 한 집회에서 “지우마 대통령은 TV나 인터넷이 아닌 길거리에서 직접 국민들을 대면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육성으로 들어야 한다”면서 호세피 대통령의 리더십 부재를 꼬집은 바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아래에서 볼 때, 연방경찰 수사의 직접적인 칼날을 피하고, 차기 대선에서 노동당의 참패는 불을 보듯 한 이런 상황에서 룰라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바로 2018년 대선 출마뿐이라는 분석이 그저 가설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실제로 룰라는 비록 ‘만약 필요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지난 8월 28일에 한 라디오방송을 통해 2018년 대선에 출마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5) 물론 2018년에 룰라의 나이가 73세라는 고령이 문제가 되겠지만 ‘Like a bridge of trouble water’(‘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의 컨셉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관적인 확신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요즘 브라질을 주목하는 안팎에서 룰라의 유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통해 브라질이라는 거인을 재해석하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운이 기가 막히게 좋았던 표퓰리스트’라는 분석과 ‘좌우를 아우르는 부드러운 좌파적 리더십의 승리’라는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뉘고 있다. 우리나라는 좌우를 막론하고 이런 룰라의 리더십에 ‘쏠림’ 현상만을 보여주었다. 과연 정작 브라질의 주인인 브라질 국민들의 현명한 판단을 지켜보는 것도 향후 브라질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92년 클린턴은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집권 중이던 선거전에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선거구호로 공화당 진영을 꺾었다. 우리나라 정치권 역시 선거를 앞두고 침체된 경기를 겨냥하면서 이 같은 슬로건이 매번 나온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존재한다면 현재 겪고 있는 위기의 원인과 극복방안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브라질의 경우, 현재 직면한 위기가 표면적으로는 경제위기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선행될 돌파구는 바로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인 셈이다. 단기적으로는 정치 개혁안의 입법화와 국영 에너지 회사인 페트로브라스 비리 수사인 ‘라바자뚜’의 성공 여부가 향후 브라질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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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영석유공사인 Petrobras(브라질 GDP의 13%를 차지) 고위임원직에 연합정당의 나눠서 고위직을 임명하고 조직적으로 건설사로부터 리베이트와 커미션을 받아 정치자금으로 사용한 사건. 결국 문제는 2009년 대선자금에 사용됐다는 곳에 수사의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2) 라바자뚜’는 세차를 할 때 사용하는 고압세척기를 의미한다. 브라질 국영석유공사 페트로부라스(Petrobras)와 관련된 비리 정치인들을 연방경찰이 조사하고 있는 수사 작전의 명칭이다.

3) 브라질 현행법상 대통령 탄핵안 제의는 연방 상·하원 재적인원의 3분의2의 동의와 342명의 찬성이 있어야 통과된다. 1992년 국민시위로 촉발되어 꼴로르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적이 있다.

4) 룰라 취임 당시, 의석점유율이 18%에 불과했고 정치자금도 없었던 노동당이 연립정권의 정당들을 아우르기 위해 국영기업의 돈을 빼내어 의원들에게 매달 정기적으로 비자금을 제공한 사건.

5) http://mais.uol.com.br/view/15589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