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철(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최근의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이 녹녹치 않다. 물가 상승률이 35~40%로 뛰고 있고 인플레이션 수준도 30%에 육박하고 있다. 그동안 농산물 수출 등으로 비축해 놓은, 한때 550억 달러에 이르던 외환보유고도 2014년 276억 달러 수준을 기록하면서 아르헨티나 정부는 각종 규제를 통해 달러의 해외 유출을 적극 막고 있는 실정이다. 환율 또한 통제가 어려울 정도로 상승하고 있는데, 2013년 1달러당 6.3페소의 환율이 2014년에는 8페소로 급등했고, 암시장에서는 달러당 12페소까지 거래되고 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는 2015년 말까지 210억 달러의 외채를 상환해야만 할 처지에 있다. 아르헨티나의 이런 경제 상황은 2001년의 디폴트 사태 직전의 상황을 우리로 하여금 상기케 하지만 개방과 자유화가 아닌 각종 규제를 통해 현 경제 난관을 극복하고, 공무원 연금 인상 및 복지 확대 등과 같은 포퓰리즘을 구사하는 페론주의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보면서 필자는 이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1970년대 군부 독재 시기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떠올리게 된다.

  1930년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이래 1970년대까지 아르헨티나는 쿠데타로 얼룩진 역사였다. 그러나 1976년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만큼 그렇게도 처참하고,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쿠데타는 없을 것이다. 당시 군사정부의 통치 철학은 군사정부 1대 대통령이었던 비델라 육군참모총장의 다음과 같은 언명에서 잘 드러난다. “테러리스트는 반드시 폭탄이나 총을 소지한 자만이 아니다. 테러리스트는 서구 기독교 문명을 반대하고 그 생각을 퍼뜨리는 모든 사람들이다.” 여기에 더해 이베리코 생 장이라는 한 장군은 정치적 레토릭을 던져버리고 보다 직접적인 어법을 통해 “우리들은 국가를 전복코자 하는 자들을 우선 죽여 버릴 것이다. 그 다음 대상은 우리 목표를 따르지 않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이다”라고 하면서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겁박했다. 그리고 이어 국민을 상대로 “추악한 전쟁”(Dirty War)을 벌여 수많은 사람들을 납치, 고문, 살해하는 등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수만명이 죽거나 실종되거나 구금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망명길에 올랐다. 이 모든 것은 국가를 개조한다는 미명하에 서 자행되었다.

  1976년 4월, 군부가 집권하면서 발표한 “국가재건 프로세스”(Proceso de Reorganizacion Nacional)의 특징은 서구 기독교 문명에 기반하여 아르헨티나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서 급진적으로 재조직하거나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재건의 목표 기간은 ‘프로세스’(과정)라는 용어에서 보듯 정해져 있지 않았다. 한편, 이 ‘프로세스’라는 용어에는 반영구적으로 독재 체제를 유지해 보겠다는 그들의 저의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군사 쿠데타 직전의 이사벨 페론(페론의 두 번째 부인) 정권 시기의 무질서와 혼란에 절망한 대부분의 아르헨티나인들은 초기에 이 정변을 묵인하는 분위기였다. 한마디로 대다수 국민들은 새로운 군사정부가 부패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혼란을 막고 안정과 질서를 가져다주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기에 처한 아르헨티나 경제를 정상화시켜 줄 것을 기대했었다. 이런 국민의 열망에 부응하여 군부의 신경제정책을 설계하고 그 계획을 주도한 사람이 마르티네스 데 오스(Jose Alfredo Martinez de Hoz) 경제부 장관(1976-1981년까지 역임)이었다. 그는 군사정부에 발탁되어 입각하기 전, 철강회사를 소유한 기업인이자 아르헨티나 경제협회의 회장이었고, 비밀리에 군부와 접촉해 쿠데타를 사주했던 인물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신자유주의의 본격적인 도입이나 시행은 1990년대 메넴 정부 시절에 이루어지지만 데 마르티네스 데 오스의 보수-자유주의적 성향에 입각한 경제 정책을 고려해볼 때 그가 아르헨티나에 최초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편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마르티네스 데 오스의 경제정책은 군사정부가 내건 국가개혁, 자유화 및 안정이라는 세 개의 축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군부가 취한 최초의 정책은 일련의 안정 조치였는데 그것은 경제개방과 금융시장의 자유화 정책으로 나타나게 된다. 당시 군사정부는 만연한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고 무역수지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IMF 및 외국 금융기관이나 은행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이에 외국기업의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로서 외국자본의 완전한 개방, 외국자본의 유출입 기간의 축소, 외국투자에 대한 규제 철폐 및 수입세의 감면, 페소화의 평가절하와 같은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런 경제 개방으로 아르헨티나 국내 생산품은 경쟁력을 잃고 아르헨티나 산업은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그리고 군사정부는 외국기업의 이익 보호를 위해 노동법을 개혁하고 단체협약을 금지시켰으며, 노동운동을 탄압하였다. 한편, 군사정부는 국방과 사회의 안전 부문을 제외한 교육, 건강, 주거 등 공공 서비스에 대한 예산은 대폭 축소하였다. 그리고 공공부문의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페소화를 평가절하하고 봉급을 동결하였는데 이로 인해 가장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노동자들이었다. 이때 노동자들의 급여는 5년 전에 비해 물경 40%나 감소하였다. 이런 반노동자 경제정책을 통해서 봉급을 삭감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철저히 금지시키자 아르헨티나 국민총생산에서 봉급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현저히 감소하고, 국민의 생활수준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래 그림을 보면 아르헨티나의 빈곤율은 1940년대 이래 10% 이하를 계속 유지하다가, 1974년에는 5.8%로 하락한다. 그러다 군사정부 시절인 1980년에는 12.8%, 1982년에는 무려 37.4%로 증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실업률 또한 1975년 10월에는 3.8% 수준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됐지만, 1982년에는 최고 18%까지 상승했다.

 

그림 아르헨티나 빈곤율의 추이(1965-2005). 검은 부분의 PRN 표시는 ‘국가재건 프로세스’(Proceso de Reorganizacion Nacional)의 약자로서 1976년에서 1983년까지의 빈곤율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INDEC

 

  앞서 언급했듯이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의 신경제정책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에 외국차관의 도입을 제한하는 규제를 완화하고 세계 금융시장의 요구에 맞추어 금융규제 완화정책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1978년에는 외환법을 고쳐 미국 달러에 대한 아르헨티나 페소화의 절하율을 점차 낮추어(궁극적으로는 제로가 되는) 환율변동을 사전에 알리는, 일종의 환율변동예고제라고 할 수 있는 '라 타블리타'(La Tablita)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결과적으로 아르헨티나 페소화를 절상시키는 효과를 가져와 자본의 해외 도피를 야기시켰고 이는 결국 금융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리고 해외의 잉여 자본과 이를 유치하기 위한 아르헨티나 국내 정책이 결합한 결과로 외채가 폭증하게 되는데, 1975년 약 78억달러 정도였던 외채는 1983년에 이르면 약 450억달러로 늘어난다. 결국 군사정부의 통치 기간, 국가가 재건되기는커녕, 이 기간에 증가한 외채는 고스란히 아르헨티나 국민의 몫으로 남았다. 1980년대 내내 이어진 외채 위기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아르헨티나 경제는 회복 불능의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런 군사정부의 실패를 한 번에 만회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비델라에 이어 대통령이 된 갈티에리 장군이 일으킨 포클랜드 전쟁(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전쟁)이었고 그 전쟁 결과로 군사정부가 붕괴하고 민간정부가 들어선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평심하게 이야기해서 이 시기 아르헨티나 군사정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어느 부문에서건 성공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국가재건과 경제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무고한 사람이 수없이 죽어갔고,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제는 파탄이 났다. 마르티네스 데 오스가 펼친 경제정책으로 드러난 결과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을 하나 꼽으라면 자본의 집중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신자유주의가 표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민간부채에 국가가 개입하면서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렇게 부는 소수의 기득권자들이나 외국자본에 넘어갔고 사회는 극심한 양극화로 분열되었다. 이것이 군사 통치 7년간의 결과였다. 그들이 이룩한 유일한 성과라면 아마도 1978년 월드컵 대회에서의 아르헨티나 우승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