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경미(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1949년 콜롬비아 정부는 군의 전문화를 위해 똘레마이다(Tolemaida)에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천일전쟁(1899-1902)과 파나마 분리 독립을 계기로 영향력이 강해진 군은 레예스(Rafael Reyes) 대통령의 사관학교 설립을 계기로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1932-1933년 사이 페루와의 국경분쟁, 1946년 이후 지속된 장기간의 정치적 폭력사태를 통해 발언권이 강화된 군은 1953년 국내정치 혼란을 틈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중남미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문민우위의 전통이 강한 콜롬비아는 게릴라 활동 및 정국 혼란으로 인해 군부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초기 콜롬비아 군은 칠레의 군사위탁을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스위스와 독일군 모델을 수용하여 체제를 정비했다. 이후 1939년 산또스(Eduardo Santos)정부는 미국과 군사적 접촉을 시도했으나 단지 외교적 관계로 머물렀다. 1940년 콜롬비아 군부는 프랑스 군을 모방하여 개혁을 추진했다. 프랑스 군사고문단은 콜롬비아로 파견되어 장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발발로 1941년 프랑스군의 위탁교육도 중단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전략의 일환으로 추진한 라틴아메리카 지역과의 군사협정은 콜롬비아 군부가 미국식모델 수용을 통한 현대화 추진의 발판이 되었다. 한국전 발발을 앞두고 구체화된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지역 국가들과의 군사동맹은 콜롬비아의 병력강화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한국전 참전 이후 콜롬비아군에 대한 미군의 영향력은 강화되었고, 이것은 197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콜롬비아군의 현대화는 미국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콜롬비아 군의 미군화는 1940년대 중반 체결된 군사동맹을 통해 진행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미군화는 냉전초기 추진되었으며 한국전 참전 이후 가속화되었다. 콜롬비아와 미국의 군사협정은 이미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는 콜롬비아 군부와 확실한 거리를 유지했다. 당시 미국은 FBI 정보를 바탕으로 콜롬비아 군 내부에 친 나치세력이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콜롬비아군은 1940년대 중반까지 이전에 유지해오던 프랑스 군사체계를 지속했다. 그리고 칠레, 아르헨티나 군사위탁교육도 병행하여 운영하였다. 1949년(Pacto de Asistencia y Asesoria Militar)과 1952년 군사협정(Pacto Asistencia Militar)을 통해 콜롬비아군의 구체적인 미군화는 추진되었다. 1949년 콜롬비아 군부는 4년 간 미국으로부터 최신예 무기를 지원받았다. 그리고 장교들은 미국이 제공하는 군사교육에 참여했다. 그리고 한국전 참전 이후 콜롬비아군은 새로운 군사기술의 수용을 통해 미군과 유사한 체제로 정비되었다.

한국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군사 전술과 최신 전투 장비가 투입된 전쟁이었다. 콜롬비아 정부는 참전이 군의 전문화 및 장비 현대화에 기여 할 것으로 기대했다. 비올렌시아 이후 이미 군부가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였으나 한국전 파병은 군부의 사회적 위상을 더욱 증대시켰다. 한국 위협에 따른 콜롬비아 국내 안위 문제의 증대는 군부의 중요성을 고양시켰다. 군부도 한국전 참전은 내부적 문제점을 해소하고 나아가 승진의 기회확대 및 군의 전문화를 확보할 기회로 인식되었다. 고메스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군사지원을 획득하기 위해 파병부대를 협상용으로 활용했다. 1952년 B-26전투기 지원요청을 시작으로 1954년 말 미국의 콜롬비아에 대한 무기 지원이 진행되었다.

1953년 콜롬비아 사회는 통치엘리트가 군부로 대체되는 외형적 변화를 맞았다. 당시 콜롬비아 군부는 시장, 공무원, 공기업의 임원 등 다양한 분야 진출했으며 1954년에는 국립대학 총장까지 군으로 충원되었다. 삐니야(Rojas Pinilla)군사정권은 군에 대한 투자 및 군 장비 구입에 대한 국가 예산을 증액했다. 1956년 콜롬비아 정부는 미 국무부를 대상으로 제한적인 조건하에 군장비 지원과 사용을 허용한 1952년 군사원조협정의 일부조항에 대한 수정을 요청했다. 이 조항은 미국이 콜롬비아 국내안보와 관련하여 군사지원계획이 없음이 반영되었다. 2차 대전 후 콜롬비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는 시작되었지만 실질적인 원조는 1952년 공동방위협정을 계기로 추진되었다. 콜롬비아 군 수뇌부는 개인의 이해와 특권을 바탕으로 미 군사제도를 모방한 군의 전문화를 추진했다. 미군과 함께 수행한 한국전은 콜롬비아 군부가 미 군사제도를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 참전 이후 콜롬비아군은 미 군사제도를 기초로 개인(S-1), 정보(S-2), 작동(S-3), 교육과 조직(S-3) 그리고 서비스(S-4)등 4개의 전문부서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미군체계를 동일하게 모방한 것은 아니다. 콜롬비아 현실을 반영하여 공공질서와 게릴라 및 범죄조직의 통제를 담당할 G-5부서 개설도 제안되었다. S-1의 경우 미군체계를 유지하되 콜롬비아 현실을 반영한 역할보완을 위해 군사령부 내로 배치되었다. S-2는 병사와 관련된 모든 업무(승진, 이동, 적성, 도덕, 복지 등등)에 대한 조정과 개발에 대한 책임을 담당했다. 그리고 군사 전략 수립을 위해 지리적 특성에 관한 정보를 수집, 선별하며 수용하는 업무도 병행했다. 미국식 군사모델 수용 과정에서 미군과 차별되는 콜롬비아군의 조직 재편이 모색되었다. 한국전의 실제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은 일반 사병이나 하위급 장교들이라는 점을 인식하여 군사학교 사령관은 보병에서 고위급장교들을 위한 집중과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위생담당 사령관은 전시상황에서 요구되는 외과의사의 지식을 확장하기 위해 미국의 의료센터와 직접적인 교류를 강조했다.

이전에 군부가 축적한 지식과 국내 상황이 배제된 개혁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미 군사체계를 모방하여 군의 전문화를 추진했지만 콜롬비아 군 내부에서는 기존체제를 유지하려는 경향도 강하게 작용했다. 특히 미군의 연대나 사단 체제로의 조직재편은 논쟁이 거듭되었다. 결국 군 내부의 합의로 기존 여단 중심의 체제는 유지되었다. 미군의 연대와 상부 작동부대인 사단도입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지만 사단과 같은 상위부대 조직은 콜롬비아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실현성이 없었다. 효과적으로 연대를 구성할 수 있는 인적 그리고 재정적 자원도 없었다. 군의 개혁과 관련하여 다양한 의견이 충돌했지만, 여단 존속문제는 별다른 충돌 없이 내부합의에 도달했다. 콜롬비아 군부는 여단이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체계라고 판단했다. 여단은 미군의 연대와 유사한 조직으로서 특수한 콜롬비아 지형을 고려할 때 전투효과를 최대화 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한국전 참전 이후 콜롬비아 군의 전문화는 미 군사체계를 모델로 국내적 상황을 고려하여 진행되었다. 한국전의 경험은 콜롬비아군의 조직능력향상과 장교들의 전문화 훈련에서 질과 양을 고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