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진보적 시각의 사회학자이다.
아르헨티나 태생으로 영국의 에섹스 대학교의 교수로 있으며 포퓰리즘과 헤게모니 담론의 권위자이다. 그는 이미 1985년에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라는 책을 출간했으며 21세기에 들어와 다시 포퓰리즘에 대한 책을 출간한 것이다. 그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급진적 민주주의'의 비전이다. 다시 말해 근대적 의회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는 자신의 목소리를 쉽게 내지 못하는 대중을 지속적으로 소외시키고 배제한다. 그러나 이렇게 배제되는 대중의 출현을 통해 기존의 사회관계와 권력관계가 변혁될 때에만 민주주의가 심화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즉, 대부분의 주류 학자들이 포퓰리즘을 "지도자가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인 대중을 조작, 선동하여 자신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려는" 부정적인 정치 형태로 인식하는데 비해 그는 긍적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민주주의를 정태적 제도로서 이해하는 시각은 시민과 대중을 선험적, 동질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들 대중은 정기적으로 의회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자신들을 대의할 엘리트 의원들을 선출하는 선거에 참여한다. 이로써 민주주의는 거의 대부분 작동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는 통치 또는 거버넌스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라클라우는 정치지형은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사회관계 즉 헤게모니가 움직이는 것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담론이 현실적으로 '완전하게'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근본 전제인 '인민주권'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라클라우는 "헤게모니 논리는 "(인민) 주권", "표상", "이해관계"와 같은 고전 정치이론의 범주들을 단호하게 부정하지 않으며 대신 그 범주들을 헤게모니적 접합논리가 전제하는 대상으로, 하지만 그것에 의해서는 언제나 궁극적으로 달성될 수 없는 대상으로 인식한다."(라클라우 2009,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115). 매우 애매한 담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제 정치지형의 변화는 필연성보다는 우연성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이 사회과학자들에게 제기된 맥락은 물론 90년대 초의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발전의 조건이 된다."담론을 실현하려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단계 이후에 반드시 찾아오는 역사적 필연이라고 주장하였지만 현실적으로 20세기 초에, 소비에트에서 실험한 결과 남은 것은 전체주의적인 국가자본주의의 실패와 관료적 비민주주의 체제였다. 또한 8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실험이 시작된 새로운 유토피아인 신자유주의도 유럽과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 차원에서 '장기 불황'과 '사회적 양극화'의 구조적 문제를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경제위기속에서도 가난한 대중의 집단적 주체의 형성과 생존권적 기본권의 요구를 포함하여 역동적으로 사회적 연대를 보여주게 된다. 이에 라클라우는 위의 저서에서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억누르고 있는 민주주의를 급진화 시키기 위해서는 가난하고 배제된 '타자'로서의 "대중의 요구"가 국부적으로 포위되지 않고 사회전체의 다양한 요구들과 "등가적 연쇄"(실업자의 고용, 건강, 교육 등의 요구들)의 대치전선을 구성해야 됨을 이론화시키고 있다. 이로써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와 대안적 대항적 반 헤게모니의 구축, 차베스 체제를 비롯한 민주주의의 급진화, 여러 나라들에서의 대안적 사회운동과 '대중의 요구'의 접합 등의 문제, 진보정당과 거대노조의 엘리트들과 대중의 관계 등의 여러 가지 토픽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주류 사회과학자들은 연구대상인 사회에 대한 인식을 동질적 총체성으로 인식한다면 라클라우의 인식은 한 사회가 차이와 등가의 긴장 또는 대립의 사회관계로 인식하여 완전하고 선험적인 총체성은 불가능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완성도 불가능한 목표이며 배제된 대중의 끊임없는 "출현과 요구" 즉, 포퓰리즘적 정치 형태의 출현을 통해 지속적으로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급진적으로 견인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라클라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등가성은 정확하게 차이를 전복시키는 것이므로 따라서 모든 정체성은 차이의 논리와 등가성의 논리사이의 긴장 안에서 구성된다. 이렇게 총체성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오직 긴장이다. 그러므로 최종 심급에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은 실패한 총체성이다. 또는 도달이 불가능한 완성의 장소이다. 그 총체성은 불가능하나 필요하다(라클라우 2005, 94). 이런 주장은 슬라보에 지젝의 "불가능한 것의 가능"의 논리와 상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