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호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지난 3월 19부터 23일 까지 브라질과 칠레, 엘살바도르를 순방했다. 공교롭게도 당시는 일본 지진과 쓰나미의 여파로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한 데 이어 방사능이 누출되면서 그 여파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 서부지역을 위협하고 있었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리비아의 카다피를 축출시키기 위한 공습강행을 결정하는 시점이어서 시시각각 긴장이 흐르던 시기였다. 또한 미국내에서는 연방정부 예산안이 의회에서 장기간 계류되면서 여야갈등이 첨예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오바마 대통령은 순방을 연기해야한다는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오바마 대통령은 국사를 뒷전에 두고 리우로 가족휴가를 떠난다는 일부 언론과 야당의 비난을 무릅쓰고 예정대로 순방길에 올랐다. 정상방문이란 오래 전부터 해당 정부간에 준비되는 법이고 한번 미루면 다시 일정을 잡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금번 중남미 방문 강행은 외교적 결례를 피하기 위한 것 이상의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전략적 의미가 있었다.

 첫째, 경제적 의미로서 중남미 시장은 최근 세계금융위기에도 큰 요동을 치지 않고 안정성장을 구가해 미국의 중요한 무역파트너가 된 점이다. 과거 1929년 세계 대공황은 선진국의 공장가동 중단 -> 실업 양산 -> 중남미 원자재에 대한 수요급감을 야기해 중남미 경제에 대타격을 입힘으로써 중남미경제 모델이 개방에서 보호로 전향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2008-2009년 세계불황은 미국과 유럽, 일본의 구매력을 떨어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중남미 경제는 건재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신흥시장이 중남미 국가들의 수출대상국으로서 버팀목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꾸준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 중남미는 이제는 미국의 희망이 된 것이다. 2010년 기준 미국의 대중남미 수출은 총수출의 20%를 차지해 대중국, 대유럽 수출보다도 컸다. 대중남미 수출산업에 종사하는 미 노동자는 2백만명에 이른다.

 따라서 경제회복기에 있는 미국으로서는 최근 구매력이 높아진 중남미시장의 문을 두드려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출국전 대국민 연설의 제목이 “중남미시장 열기 (Opening Latin Markets)” 라고 붙여진 것은 그런 이유에서 였다. 특히 브라질은 60억 달러 상당의 미국산 F-18 전투기구매를 놓고 미국에 기술이전 등을 요구하며 최종 결정을 미루고만 있어 정상의 마무리 세일즈외교가 아쉬운 때였다.

 둘째, 정치적 의미로서 내년 11월 미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위해 도전하는 오바마 진영으로서는 잘 해야 본전에 불과할 일본 원전, 리비아 사태, 연방예산 문제 보다는 중남미순방이 가시적인 실익을 챙기는데 더 유효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더욱이 매 10년마다 실시되는 미국 인구조사 2010년 통계가 최근 발표된 바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중남미계(Hispanics)는 가장 높은 43%의 증가세를 보여 총인구의 16.3%를 차지하고 있다. 중남미계 인구는 2000년 통계에서 처음으로 흑인인구를 추월한 이래 확고부동한 제2의 인종그룹을 이루면서 백인인구를 압박하고 있다. 따라서 흑인 배경을 갖고 있는 오바마로서는 중남미계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오바마는 2009년 1월 취임후 그해 4월 멕시코에 이어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열린 미주정상회의에 참석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중남미의 지도자들과 회동해 “동등한 동반자론 (Equal Partnership)"을 내세움으로써 신선한 이미지를 각인시켰고 중남미지역에서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그러나 정작 중미지역과 남미 방문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에 현지에서의 인기확인은 국내적으로도 용해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셋쩨,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전략적 의미일 것이다. 지난해 영국의 미코노미스트지의 중남미 특집호 제목 “무주공산 중남미 (Latin America: Nobody's Background)”가 시사하듯이 전통적으로 미국의 뒷마당이라고 불리웠던 중남미국가들의 국제관계는 최근 탈미 다변화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남미지역에서는 역내국가인 브라질과 역외국가인 중국의 영향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브라질은 세계 7위 경제로 급성장했고, 중국은 최근 미국을 제치고 브라질과 칠레 등 주요국의 제1 교역 상대국으로 떠올랐다. 이에 더해 중국은 자원개발 및 금융지원등의 수단을 통해 최근 중남미 지역에서 정치적 입김 마저 강화하고 있어 미국을 당혹시켜왔다. 특히 대형 국영기업들을 앞세워 해외진출을 펴고 있는 중국은 최근까지 아프리카지역에 공을 들여오다 2010년부터는 공세방향을 중남미로 돌렸다. 이는 중국의 해외투자규모에서 나타나는데 2010년 대중남미 투자는 295억 2천만달러로서 149억4천만달러에 그친 대아프리카투자를 크게 앞질렀다.

 또한 미국은 그동안 온두라스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 축출사건, 쿠바정책, 이란 핵시설 관련 유엔재제, 리비아 비행금지구역 선포 등 문제에서 번번이 브라질의 반대에 부딪혀 왔다. 또한 멕시코와 중미지역에 마약전쟁 불안이 파급되고 있어 미국은 이와 관련된 리더쉽을 발휘해야했다. 이번 순방에 엘살바도르가 포함된 것은 이점이 크게 고려되었다. 특히 마우리시오 푸네스 엘살바도르 대통령은 좌파 게릴라 조직인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 출신이지만 마약 폭력조직의 확산을 막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해왔다. 따라서 방문지로서 엘살바도르를 택한 것은 푸네스 대통령을 모델로 남미좌파들이 베네수엘라와 쿠바 일변도에서 벗어나 미국과의 협력 관계를 모색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포석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의 순방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는 단언하기 어렵다. 오바마의 현실주의적 접근 노력은 단기적으로는 미 의회에 계류중인 콜롬비아 및 파나마와의 FTA 비준을 가속화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또한 브라질, 칠레, 엘살바도르 등 국가들의 대미 친선외교노선을 끌어내는데 어느정도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협력의 한계 또한 여실이 나타났다.

 특히 지난 10여년간의 안정적인 경제사회정책 덕에 중산층 저변이 확대된 브라질은 머지않아 세계 경제 5위 진입을 호언하면서 그에 걸맞는 국제적 위상을 요구해왔다. G-20에 포함된 것은 당연했고 유엔상임이사국 지위도 요구했다. 항공기술 및 사탕수수추출 에탄올 강국인 브라질은 통상현안에서도 거꾸로 미국에 대해 브라질산 군수송기 구매, 옥수수 추출 에탄올 보조금 중단, 통화정책인 양적완화 정책의 중단 등을 요구했다. 이중 어느 것도 오바마대통령으로서는 명확히 약속할 수 없는 사안들이었다. 그는 특히 브라질의 유엔상임이사국 지위와 관련, 브라질의 열망을 “존중한다(appreciate)”는 정도의 입장을 밝혔을 뿐이다.

 또한 오바마는 칠레에서 중남미지역 전체를 향해 주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당초 2009년 이집트 카이로대학교에서 행한 연설에 이어 역사적인 연설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그의 메시지는 2년전 이미 언급했던 동등동반자론에 공동책임론을 얻힌 것일 뿐이었다. 즉, 통상문제, 청정에너지, 교육, 마약, 인권 등을 주제로 연설하면서 미주국가들은 차세대를 위해 공동의 책임을 져야하며 이를 위해 에너지환경협력, 인터넷을 통한 교육 혁신, 20만명 수준의 쌍방 학생 교류 등을 제안한 게 고작이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2억 달러 상당의 “중미 시민안전 동반자” 사업을 발표하는 데 그쳤다.

 따라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순방을 통해 ‘동등동반자’ 브라질의 높아진 위상을 직접 확인하며 미국으로서는 이에 부응할 형편이 못됨을 실감했을 것이다. 다만 희망적이라면 에너지, 지역안보, 과학기술 협력등 앞으로의 난제들에서 미국과 중남미가 상호협력할 길을 열어두었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중남미지역을 둘러싼 국제질서가 다변화되는 현실은, 17세기 스페인의 영향력이 식기시작하면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열강의 중남미 진출이 본격화되었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