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용석(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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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은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렸으며, 필자가 대학에 새내기로 입학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의 대학생들은 할 일이 많았다. 특히 노태우 정부라는, 선거를 통해 집권을 했지만 아직까지 군사독재의 허울이 벗겨지지 않은 불완전한 정권과의 싸움에서 대학생들은 할 일이 많았다. 나는 1학년 여름방학 즈음에 선배들의 권유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그 영화를 본 후 우리는 막걸리를 마시며 토론을 했고, 토론의 주요 내용은 ‘광주학살’을 은폐하고 있는 현 정권에 대한 ‘불타는 분노’를 표현하는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 영화는 무엇인가? 바로 ‘살바도르’(Salvador)이다. 1986년 올리버 스톤 감독이 제작한 영화 살바도르는 1980년 초반 엘살바도르 내전을 다루고 있었으며, 여기에는 군부독재 정권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및 인권유린 장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988년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시기에, 한국의 대학생들은 머나먼 중미에 위치한 엘살바도르의 상황에 비추어 자기 나라의 부조리를 이야기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980년부터 1992년까지 지속된 엘살바도르 내전은 중미 지역에서 진행된 냉전(cold war)을 대표하는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중미와 전 세계 좌파들은 FMLN(Fr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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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abundo Marti para la Liberacion Nacional)의 활약상에 고무되었고,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진영은 중미에서의 공산주의 도미노 현상을 막기 위해 끊임없는 공작과 활동을 지속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접전 속에서 상당한 피해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광주학살’과 같은 민간인 피해들이었다.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은 엘살바도르 군부와 사회주의 혁명 세력인 FMLN과의 내전에서 약 75,000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약 400,0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고향을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여야만 했다. 특히 인권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는 로메로 신부의 암살과 미국인 수녀 4명의 학살은 전 세계인에게 엘살바도르 내전의 참혹성을 알리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듯 몇 몇 사건들로만 접할 수 있던 엘살바도르 내전을 외부자의 시각이 아닌 내부자의 관점에서 기술한 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Rebel Radio'이다. 이 책은 1970년대 후반부터 FMLN의 활동과 내전의 상황을 단파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온 ‘벤세레모스(Venceremos) 혁명 라디오 방송국’의 활동상을 기술한 책이다. 전 세계의 다양한 전사(戰史)를 통해 볼 때, 게릴라전에서 문화선전대와 혁명의 상황을 고취시키는 방송의 역할은 게릴라 부대에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정부군과 비교해 볼 때 터무니없이 보잘 것 없는 구식 무기를 소지한 채 가장 강대한 군사대국에 맞서 투쟁해야 하는 게릴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들의 사상을 유지하고 혁명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고취시키는 ‘소프트웨어’의 보유 여부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1979년부터 첫 방송을 개시한 벤세레모스는 ‘혁명 라디오’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벤세레모스는 1981년부터 엘살바도르 동북부 모라산 지역 일대에 근거지를 확보한 후 구식 단파기와 소수정예 스탭, 그리고 베네수엘라에서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온 앵커 산티아고(Santiago) 등이 정부군의 감시를 피해 동굴이나 땅굴을 파고 들어가 총을 둘러맨 채 혁명 지원 방송을 진행하였다. 당시 이 방송은 FMLN 뿐만 아니라 현지민도 즐겨 애청하는 프로그램이었고, 엘살바도르 정부군은 이 방송을 중단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는 FMLN의 정치위원이자 엘살바도르 모라산(Morazan) 지역의 게릴라로 활동하던 호르헤 멜렌데스(Jorge Melendez)와 루이사(Luisa) 등이 어떤 계기와 정황 속에서 벤세레모스라는 방송국을 설립하게 되었으며, 이 방송국이 엘살바도르 내전 기간 동안 게릴라들의 전투력 향상뿐만 아니라 정부군과 미국에 의해 가려질 수 있었던 수많은 진실을 어떻게 전 세계에 알려내고 있는 가를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는 1981년 12월, 엘살바도르 동북부 모라산 지역에서 미국에서 훈련받은 아뜰라까뜰(Atlacatle) 특수부대에 의해 자행된 약 1,000여 명의 민간인 학살이 벤세레모스 방송국에 의해 최초로 공개되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당시 미국은 군사원조의 일환으로 엘살바도르 군대에게 대 게릴라 전 훈련을 수행케 하였는데, 이 부대가 1981년 12월 6일부터 13일까지 북부 모라산 지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약 1,000여 명이 넘는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과 엘살바도르 정부의 철저한 부인 속에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잊혀질 수 있었으나, 벤세레모스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전 세계에 공개되었고, 1992년 엘살바도르 정부와 FMLN과의 평화협상이 체결된 이후에는 학살 지역에 대한 유해 발굴이 실시되어 당시 참혹했던 학살의 현장이 낱낱이 공개되기도 하였다.
중미의 작은 국가 엘살바도르에서 발생하였던 내전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엘살바도르 내전은 한국의 역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일종의 ‘동질적인’ 측면을 분명 가지고 있다. 두 국가는 냉전이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내전을 겪었으며, 이 과정에서 동족 간에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경험하였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일정기간 동안 진실위원회(Truth Commission)를 가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2009년 엘살바도르 대선에서 과거 게릴라였던 FMLN이 집권 정당으로 우뚝 선 것은 우리가 엘살바도르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 왜 내전 당시 게릴라들의 정황과 역사적 맥락을 더욱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 추가적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금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거시적 맥락에서 바라보던 엘살바도르 내전을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사유로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