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배 (칠레대 사회과학 박사과정)

 

쿠테타 40년 재조명

  전투기가 대통령궁을 폭격한다. 거대한 먼지가 뒤덮는다. 1973년 9월 11일, 칠레 대통령궁 라모데다에서의 쿠데타 장면은 수없이, 수없이 TV에서 되풀이됐다. 8~9월 칠레에서 지겹도록 보고 들은 단어, '쿠데타 40주년'이다.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1973년 무너진 지 올해 40년이다. 9월 11일 앞두고 TV에서 특집 방송이, 주간지는 특별판이, 대학에서는 특별 세미나가 이어졌다. 지상파 TVN 채널이 9월 11일 방송한 다큐멘터리 '1973년: 우리의 삶을 바꾼 해'라는 제목처럼, 1973년은 칠레의 트라우마였다. 세계에 9월 11일은 2001년 세계를 흔든 9.11 미국 세계무역센터 테러가 벌어진 날로 기억되지만, 칠레는 40년 전 쿠데타가 압도했다. 아옌데 정부 당시 장관을 지낸 세르히오 비타르가 9월 8일 칠레 일간 <엘메르쿠리오> 인터뷰에서 표현했듯 "기억의 폭발을 보고 있다."

(사진설명1)칠레 쿠데타 40년을 맞아, 9월 9일 대통령궁 옆 안토니오 바라스 극장에서 특별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사진설명2)칠레 산티아고 시내 버스정류장 옆 가판대에 쿠데타 40년 특집 잡지들이 9월 9일 팔리고 있다.

(사진설명3)칠레 쿠데타 40년과 관련 특별 연극 공연 시리즈를 알리는 포스터가 9월 9일 대통령궁 근처에 붙어 있다.

  

과거에 머문 담론, 가려진 오늘의 유산

  낯선 외국인의 주목을 끄는 것은 쿠데타를 둘러싼 담론이다. 40년,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었을 지금도 담론은 과거를 맴돌았다. 쿠데타 당일 아옌데의 주검을 발견한 소방관과 고문현장에서 살아남은 자의 증언처럼, 과거에 대한 증언이 새롭게 이어졌다. 칠레대 본관 서점 한편에는 쿠데타 40년 특집 코너가 마련됐는데, 그곳을 매운 것은 역시 과거에 대한 증언이 대부분이었다. '주년'이라는 것이 과거에 대한 회상이더라도, 40년 전 과거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듯 보였다.

(사진설명4)9월 9일 칠레대 본관 밑 서점에 쿠데타 40년 관련 특별 코너가 마련돼 있다.

  쿠데타 40년 뒤 오늘은 어디에 있는가? 쿠데타를 둘러싼 담론은 왜 여기에 머물고 있을까? 지금 같이, 또는 더 논의해야 하는 것은 40년 전에 끝나버린 과거가 아니라, 4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살아가는 오늘에 남은 유산이 아닐까? 피노체트 체제의 신자유주의 사회경제 모델이 남기고 간 공과, 현실적으로는 '시장이라는 신'(El Dios Mercado)에 대한 맹신이 남긴 모순적 현실 말이다. 과도한 민영화가 남긴 현실은 어떠한가? 소득수준에 비해 턱없이 높은 전기, 상수도, 대중교통 등의 공공요금, 질 낮은 공공 의료 및 교육, OECD 최악의 빈부격차……. 라디오 <코페라티바>가 센트랄대학교 등과 실시한 뒤 9월 3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학무상교육 및 공교육 강화 등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81.2%가 찬성한다고 밝혔다. 이렇듯 쿠데타 이후 뿌리내린 신자유주의 사회경제 모델이 남긴 모순은 칠레가 내세우는 경제성장의 반대편에서 그늘을 드리웠다. 한동안 혼란스러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40년이 지난 그 과거는 과거가 되어 버린 게 아니라, 칠레에서 아직도 현재이자 오늘로 머물러 있음을 깨달았다. 오늘과 내일을 얘기하기에는 과거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끝나지 않은 과거사 정리

  아직도 1천명 가까운 군사독재 시절 실종자의 행방을 알지 못 한다. 그러다보니, "주검이라도 찾고 싶다"는 희생자 가족의 절규가 아직까지 방송에 나온다. <코페라티바> 9월 10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8.1%는 독재기간 인권침해에 대해 아직 진실을 다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칠레에서 과거사 정리 노력이 없었던 게 아니다. <칠레 문민정부의 과거사 정리>(2005, 대통령 보고서)를 보면, 피노체트가 물러나고 파트리시오 아윌린 대통령 집권 뒤 1990년 4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가 설립돼 3550건의 사례를 조사했다. 위원회는 인권유린으로 인한 사망 및 실종자가 1973~1990년 사이 2279명, 불법체포/구금 및 고문당한 건수는 2만7255명으로 파악했다. 위원회는 1991년 2월 8일 1300 쪽의 조사 보고서를 제출하고, 이행기구로서 '국가보상 및 화해공사'가 1992년 1월 설립돼 2년간 활동했으며 인권 옴부즈맨이 설치됐다.

  에두아르도 프레이 정부는 피노체트가 영국에서 구금된 뒤 1999년 8월 21일 '민-군 대화협의체'를 설치했고, 실종자 행방파악 방안 등을 논의한 뒤 2000년 6월 '인권관련 성명'이 발표됐다. 미첼 바첼레트 전 대통령이 수감됐던 Villa Grimaldi도 프레이 정부에서 평화공원으로 조성됐다. 희생자의 사진들 옆으로 '고문장소-매달기' 등의 표시가 새겨진 그곳에서 2010년 방문 당시 느꼈던 송연함이 아직도 또렷하다.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은 2003년 11월 '국가 정치구금 및 고문에 관한 국가위원회'를 대통령 자문기구로 설립했다. 1년간의 활동 뒤 라고스 대통령은 2만8천 건의 피해사례를 인정하고, 국가인권기관 설립, 피해자 보상 등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문민정부의 과거사 청산 노력은 피노체트 퇴진 이후에도 막강했던 군부세력과 이들이 마련한 보호 장치로 인해 벽에 막혔다. 1973년 9월 11일~1978년 3월 10일 사이 '국가적 비상상황'에서 벌어진 모든 정치 및 일반 범죄 행위자에 대한 형사책임을 면제하는 사면법이 1978년 4월 발효돼 버티고 있었다. 1980년 개정된 군부우위 헌법도 가해자인 군부에 대한 처벌을 어렵게 만들었다. 친 군부 법관들이 장악한 사법부도 군부의 권한 남용 및 인권유린 행위에 대한 처벌에 미온적이었다. 이렇다보니, 피노체트가 물러난 뒤 첫 과거사 청산 작업인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는 고문, 불법구금, 추방 관련 사건이 조사대상에서 빠졌고 사법처리 권한은 전혀 없었다. 결국 군부의 협조를 받지 못한 채 9개월간의 한시적 활동 뒤 수많은 실종자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하고 끝났다. 민주화 이후에도 피노체트 세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협약된 이행' 체제 하에서, 진실규명과 정의실현보다 용서와 화해를 강조했던 과거사 청산의 산물이었다. 피노체트가 형사처벌이라는 역사적 심판을 받기 전에 2006년 12월 자연사한 것은 어쩌면 칠레의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상징이다.

머나먼 화해

  그러니 쿠데타 뒤 40년이 지났지만 화해는 먼 이야기다. <코페라티바> 9월 10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정의가 부족하다(86%)거나 인권침해 가해자들이 용서를 빌지 않았다(84.5%)는 응답이 절대 다수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8.1%는 인권침해가 정치세력의 거짓말이라며, 아예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화해하지 못했다는 응답이 79%에 이른다. 9월 3일 여론조사기관 CERC 설문 결과는 이념 진영별 확연한 인식차이를 보여준다. 전체 응답자의 41%가 쿠데타의 책임이 피노체트에게 있다고 답했지만, 아옌데와 인민연합(UP)을 지목한 응답도 각각 9%와 7%로 나타났다. 26%가 모른다거나 답변을 거부했다. 지지정당별로 보면, 우파 UDI 지지자의 69%가 쿠데타의 이유가 있었다고 답한 반면, (중도)좌파 PDC(85%), PPD(89%), PS(80%) 지지자는 이유가 전혀 없다고 답했다. 이렇다보니, 우파 UDI 지지자 69%는 쿠데타가 마르크스주의에서 해방시켰다는 반면, PS 지지자는 85%가 민주주의를 파괴했다고 답했다.

  여기서 드러나듯, 쿠데타 이후는 물론 쿠데타 이전의 상황에 대한 평가도 합의되지 않았다. 아옌데 집권기의 혼란에 대한 다른 해석만큼 역사적 평가의 간격도 크다. 당시 설탕 등 생필품을 사려고 길게 늘어선 줄과 파업, 최루가스와 투석, 행진, 시위……. 1970년 대선에서 아옌데는 36.3%를 얻어 각각 34.9%와 27.8%를 얻은 경쟁후보를 누르고 가까스로 승리해, 결국 다수가 반대편에 선 채 출범했다. 구리 광산, 대토지 등의 국유화와 기록적 인플레이션, 미국의 반아옌데 공작 등은 기득권과의 계급갈등 및 의회 열세 등과 맞물려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이어졌다. 그 혼란은 선거를 통해 꼽은 정부를 군사력으로 무너뜨린 쿠데타에 대한 '구국'의 명분으로 지금까지 거론된다. TV 토론에서는 당시의 혼란이 쿠데타를 정당화할 수 있느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정당화하는 것이냐?"는 공격과 "원인을 제공했다"는 반박이 맴돌았다.

  당시의 혼란이 방송 화면만으로는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어느 정도였을까? 9월 11일 대학원 수업은 취소됐고, 딸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도 시위와 혼란을 우려해 오전 수업 뒤 일찍 문을 닫았다. 며칠 전부터 시내 곳곳에서 복면 시위대에 의해 버스가 여러 대 불탄 뒤였다. 이날 밤 산티아고 거리 곳곳과 남부 콘셉시온 등에서는 새벽까지 화염병과 최루탄이 오갔고, 일부 지역은 정전됐다. 나이 지긋한 한 택시 기사는 쿠데타 직전의 상황에 대해 "날마다 최근 며칠 같았다고 보면 된다"며 "혼란에 사람들이 지쳐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동네 도서관에서 만난 한 노인은 쿠데타 직후 "끔찍한 인권침해가 벌어질 줄은 생각도 못하고, 불안한 혼란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에 어머니와 함께 국기를 흔들며 기뻐했다"고 전했다.

진실과 정의 없이 화해 없어

  피녜라 대통령은 9월 9일 대통령궁에서 열린 쿠데타 40년 행사에서 "우리의 민주주의 파괴로 이어진 어떠한 행동과 원인, 실수도 생명과 고결함, 존엄에 가해진 용납될 수 없는 유린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면서도 "아옌데 정부는 국가 최고기관들의 명확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법치국가와 그 적법성을 되풀이해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인식은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 후보가 같은 날 '기억의 박물관'에서 열린 기념행사에서 "쿠데타가 숙명적이고 불가피한 운명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며 "진실과 정의, 애도가 없는 상태에서 화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과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cooperativa> 9월 10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오늘처럼 두고 미래를 얘기할 수 있을까, 아니면 진실과 과거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만 할까?'라는 질문에 65.7%가 '미래는 과거에 대한 진실이 규명될 때만 가능하다'고 답했다. 33.6%만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답했다. 쿠데타 40년 뒤에도 아물지 못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보여준다. 9월 4일 판사협회에 이어 9월 6일 대법원이 독재정권 당시 '사법부가 고문 등 인권침해를 막고 인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훨씬 더 수행했어야 하는데 충분히 하지 못했다'고 책임을 인정했다. 늦었지만, 화해를 위한 큰 걸음이다. 하지만 칠레는 독재기간 침묵한 이들보다, 가해자들의 고백과 사죄, 역사적 단죄를 더 원하는 듯 보인다. 진실과 정의 없이 용서도 화해도 어렵기 때문이다. 칠레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가 얼마나 지난한지 다시 깨닫는다.

(사진설명5)쿠데타 40주년을 이틀 앞둔 9월 9일 칠레 대통령궁 뒤편에 아옌데 전 대통령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사진설명6)칠레 대통령궁 뒤편 아옌데 전 대통령 동상 앞에서 9월 9일 관광객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