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
이 책은 현대 프랑스의 유명한 좌파 정치철학자인 에티엔 발리바르가 17세기의 스피노자의 정치철학, 신학, 윤리학의 핵심적 담론을 현재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그야말로 인문한국 연구의 한 방식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스피노자는 오늘날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진보적 흐름을 개척한 사람이다. 이미 몇 백 년 전에 근대성의 출발점인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흐름을 비판한 위대한 비주류 철학자이다. 유럽의 합리주의 인식론의 핵심은 영혼과 육체의 위계서열적 이분법에 있다. 물론 전자가 우위에 있음은 물론이다. 이에 비해 스피노자는 "영혼과 육체가 두 개의 다른 '실재'가 아니라 하나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일한 개인이 어떤 때는 사고의 복합체로 어떤 때는 육체의 복합체로 인지된다. 즉 영혼은 육체의 사고이다"고 한다(2008, 위의 책, 90).
스피노자는 1632년에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677년에 헤이그에서 사망했다. 스피노자의 가문은 원래 스페인에서 살던 유태인이었다. 그런데 강제 개종 등 종교적 박해가 심한 스페인을 피해 포르투갈로 갔다가 1600년에 얼마 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이 당시 네델란드는 엄격한 칼빈파의 개신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종교적 관용이 강했고 자본주의가 자유롭게 발전하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어린 시절 라틴인문학과 철학을 주로 공부했다. 그의 대표적 저작물인 '신학, 정치학 이론'은 1670년에 익명으로 출판했는데 주류사회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게 된다. 스피노자는 합리주의의 프레임과 달리 인간행동에서 이성 외에 감정의 흐름(정동, affects)을 중시하며 희 노 애 락이 인간의 영혼을 흔들어놓는다고 주장했고 "차이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영혼의 흔들림을 극복하고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쓴다(위의 책, 86)고 했다. 즉 정치에서 이미지가 중요함을 이미 스피노자는 지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 민주주의 정치에서 선거운동을 통해 드러나는 대중의 흔들림과 엘리트에 의한 대중 조작의 작동을 보다 쉽게 이해하게 해준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우리가 연상할 때 법률과 제도로만 형식적으로 접근하기 쉬운데 스피노자는 구체적인 행정, 정책 시스템, 대의 결정과 통제 과정을 "국가 기구들"이란 이름의 역동적인 제도로 이해한다(위의 책, 120).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통치자와 사회 계급으로 불리는 피통치자 사이의 관계가 그 제도를 주조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식이 실천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스피노자는 철학은 반드시 정치적 실천이 됨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민주주의'의 개념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표현의 자유"임을 강조했다. 행동에 있어 과격한 것은 문제가 되지만 "생각과 언술"은 그것과 구별하여 유연하게 최대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임을 강조하였다. 이 같은 스피노자의 주장은 오늘날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상식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적 인식의 실천이 바로 표현의 자유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어느 사회의 민주주의의 척도를 재는 가장 기본적인 준거가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있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특히 민주주의가 발달한 유럽 국가들에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근본적 민주주의의 가치와 사회적 협약에 대한 컨센서스의 중요성을 이미 스피노자가 강조한 것을 보면 놀랍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같은 컨센서스 성공의 전제조건이 국가가 부패하지 않고 "폭력적"(위의 책, 119)이지 않을 때 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폭력적이란 의미는 사회의 내부적, 외부적 평등성이 중요시됨을 의미한다. 이런 사회에서만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됨을 주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얼마 전 우리사회의 유명한 정치학자가 90년대 말에 통치세력이 바뀌었다고 '민주화'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쉽게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쉬운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측면에서 현재적 의미를 지니는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적 주장의 출발점은 신학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 사회적 컨센서스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종교적 협약 또는 컨센서스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컨센서스가 합리적 수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연대의 감정 또는 열정에 기초해 받아들여져야 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서열적인 유교문화를 가진 우리사회는 정치적 컨센서스의 확립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유럽의 중세에서도 영혼과 육체의 위계 서열적 이분법이 존재했으므로 엘리트와 지도자는 영혼을 그리고 대중은 육체를 상징하면서 차별성이 존재했다. 이를 가톨릭 내부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교회의 지도부인 성직자가 우위에 있고 평신도는 아래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 그런데 '공포'로부터 벗어나길 강력히 '희망'하는 주체는 "자신보다 우월한 권력을 상상하는 하나의 욕망에 자신의 몸과 영혼을 합친다. 그리고 계속해서 복종하게 되면서 복종하는 사람은 명령을 내리는 주체가 전능한 것으로 상상해야 한다"(위의 책, 91). 하느님을 우리가 어떻게 기복적으로 숭배하는 지 이해할 수 있다. 이와 똑 같이 우리가 자유를 포기하고 지도자에게 그 자유를 전부 미루고 맡기는 인식과 정동의 메카니즘을 아주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즉,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맡긴 지도자에게 대중은 오직 아부와 맹종만이 있다가 그 결과가 안 좋게 되면 180도 바뀌어 경멸과 분노를 보이는 것이다. 즉 자신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 당시 주류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하느님을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주체로 보지 않고" 또한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하느님의 명령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하고 필요하기 때문에 그냥 자연적 존재로 여기고 상호 자유를 존중하게 되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우정이라고 부른다"(위의 책 92).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적 연대와 우정이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와 문화를 전공하는 필자로서는 스피노자의 이런 생각이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는 핵심어라는 점에서 매우 신선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데카르트에서부터 시작된 영혼과 육체의 이분법적 사고의 흐름이 유럽 중심적 인식론과 철학의 위계 서열적 또는 차별적 태도로 이어졌고 이것이 곧 근대성이 감추려고 하는 식민성이다. 이런 시각에서 주류적 거대담론을 비판하는 새로운 철학적 그리고 정치적 담론이 바로 90년대부터 시작된 라틴아메리카의 인문학자들의 근대성/(탈)식민성 담론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비판담론이 어느 면에서 스피노자의 흐름을 이어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최근 중요한 변혁의 아이콘이 되어있는 차베스 체제의 정치철학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스피노자가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차베스 체제는 급진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변혁적 체제이다. 그러나 비록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선호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는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의 사회주의 방식의 위계 서열적 근대성의 프레임을 벗어나려는 변혁운동임을 인식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주민평의회'등의 실험과 노동자 공동경영의 혼선및 조직 노조의 주류세력과의 갈등(조돈문 교수의 최근 논문을 참조)등의 흐름을 단지 차베스가 적대와 갈등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주류적인 포퓰리스트적 시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차베스는 의회민주주의와 정당민주주의의 기본적 틀인 '푼토 휘호' 체제를 거부한 지도자이다. 자유주의적 제도화의 틀이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미조직 노동자 또는 비공식노동자 등을 배제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런 틀을 전복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차베스는 대기업 자본가와 지주 등 과두 귀족적 지배계급 외에도 조직노조의 간부세력들도 진정으로 배제되고 소외되는 기층 노동자를 대의할 수 없다고 본다. 그렇기에 '주민평의회'와 '노동자 통제'를 강조하고 조직노조의 중심세력이 아무리 급진적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극복을 사회주의 이념과 계급투쟁의 담론을 가지고 강조하여도 그들과의 연대를 거부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해적이기 까지 보이는 차베스의 이런 정치 행태를 스피노자의 수평적 연대의 '우정'의 개념적 시각을 통해보면 차베스체제의 비전이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아니라 수평적 연대의 자유로운 결합의 새로운 사회를 강조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존의 독재체제의 대중들처럼 독재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평범한 대중과 노동자들이 중요한 사회적 행위자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도적 사회적 행위자가 된다는 것은 주민평의회의 경우,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이 사고하고"(위의 책, 98) 표현함으로써 "집단적 해방의 전략"(위의 책, 98)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주류적 자유주의 시각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정부나 의회에 즉 엘리트 지도자에게 대중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베네수엘라에서 현재 시행중인 주민평의회는 주민들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어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서 표현의 자유를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베네수엘라의 트로츠키 추종의 급진 좌파 세력이 기존의 계급투쟁 일변도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에 매몰되어 조직 노동자의 정치 세력화만을 기계적으로 주장하면서 선험적인 비판을 계속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에 비해 차베스 정부는 주민평의회를 통해 그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다양한 욕망과 기질을 표현하고 실현하게 하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에 있어 권력의 배분이 개인들의 욕망과 기질의 다양성에 부응하는 방식일수록 정부의 통치성의 효율성을 높이게 된다(위의 책, 118)는 스피노자의 지적을 차베스가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차베스 체제가 사회주의라는 로고를 달고 있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급진적 '자유주의'의 체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매우 애매한 체제가 차베스 체제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적 과정에 위에서 스피노자가 부정적으로 인식한 맹목적인 지도자에의 추종이라는 포퓰리즘적 정동의 요소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스피노자가 지적하였듯이 사회적 동의와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가치의 필요에 대한 사회적 컨센서스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 컨센서스를 사회적으로 '공포'의 감정에 사로잡힌 대중에 의해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문제이다. 예를 들어, 현재 베네수엘라의 경우 격렬한 정치적 대립과 증오의 감정이 큰 것을 고려할 때 양측 모두 컨센서스를 이루기 힘든 상황이다. 아무튼 정부가 부패하지 않고 폭력적이지 않을 때 이런 컨센서스가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아직 차베스 정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데 유보되는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차베스 정부가 추진한 조합운동 등에서 드러나듯이 차베스 정부의 상당수 관료들의 부패 문제와 함께 베네수엘라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폭력적 범죄의 문제가 아직 완화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