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작성일 : 2016-06-30 14:23:18 조회수 : 591
국가 : 칠레 언어 : 한국어 자료 : 문화
출처 : 경향신문
발행일 : 2016.06.28
원문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282226015&code=970100
원문요약 : 칠레의 시인 빅토르 하라
   

 
 

칠레 혁명시인 빅토르 하라 ‘43년 만에 찾은 정의’

“일어나, 그리고 네 손들을 보렴. 형제들의 손을 잡고 피로써 하나되어 갈 거야. 오늘은 내일이 되는 시간. 우리를 해방시키자.”(빅토르 하라, ‘노동자를 위한 기도’) 

혁명의 중심에는 노래가 있다. 1960~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운동에는 ‘누에바 칸시온(새 노래)’이 있었다. 소작농의 아들로 극작가이자 음유시인이었던 칠레의 빅토르 하라에게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었다. 

하라는 1932년 산티아고 부근의 농촌 마을 론켄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불우했다. 아버지는 주정과 폭력을 일삼다 집을 나갔고, 민요와 기타를 가르쳐 주던 어머니는 그가 18세 때 세상을 떠났다. 칠레대학 연극학교에 입학한 그는 1958년 민요 연구그룹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누에바 칸시온 운동에 합류했다. 중남미에 밀려들던 미국 상업문화에 맞서 라틴아메리카 민요에서 민족 정신을 찾는 문화운동이었다. 당시 칠레는 혁명의 분위기로 들끓고 있었다. 하라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끌던 좌파 인민연합 지지자였다. 기타와 목소리로 아옌데 선거운동을 도왔다. 아옌데가 대통령에 취임한 1970년에는 칠레를 넘어 국제적인 스타가 됐다. 소련 공연 뒤 현지 언론이 “하라의 노래 실력은 모스크바에서 받은 수술 덕분”이라고 홍보할 정도였다. 

1973년 9월11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대학 강의실에서 밤을 지새던 하라는 이튿날 수천명의 아옌데 지지자들과 함께 산티아고 국립체육관에 끌려갔다. “수많은 사슬은 끊어지고, 우리는 승리하리라.” 하라는 이 곳에서도 다른 수감자들과 노래를 불렀다. 군인들은 그를 개머리판과 구둣발로 무자비하게 때렸다. 사흘 뒤 하라는 산티아고 공동묘지 바깥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기타를 치던 손가락은 뭉개졌고, 잔혹한 고문 흔적과 44발의 총상이 온몸에 남았다. 

아내 조안은 탈출해 세계를 돌며 피노체트 정권의 잔학성을 알렸다. 칠레에 민주정부가 들어선 덕에, 가매장됐던 하라의 시신은 2009년 수천명의 추모객이 모인 가운데 다시 장례가 치러졌다. 칠레 진실화해위원회는 하라의 머리에 대고 ‘러시안룰렛’을 하다가 그를 쏘아죽인 혐의로 전직 장교 페드로 파블로 바리엔토스를 기소했다. 바리엔토스는 유죄평결을 받았으나 이미 1989년 미국 플로리다로 도주한 뒤였다. 칠레 정부의 송환요구를 미국은 묵살했다. 


그래도 과거의 범죄를 온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27일(현지시간) 플로리다 법원은 바리엔토스가 하라의 유가족에게 2800만달러(330억원)를 보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라가 숨진 지 43년 만의 판결이었다. 살인자는 수십년간 단죄를 피해 숨어 살면서 차량 판매원, 패스트푸드점 종업원 등을 전전하고 있었다. 하라의 유족들은 기뻐했으나, 피노체트의 하수인에게 보상금을 받아낼 생각은 없다고 했다. 조안은 “오늘날 칠레에서는 진실을 찾으려 애써온 수천 명의 가족들에게 정의가 이뤄지고 있다. 오늘의 판결로 이런 치유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는 성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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