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작성일 : 2017-03-07 16:09:23 조회수 : 1,495
국가 : 콜롬비아


차경미(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2010년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았다. 전쟁은 한국뿐만 아니라 머나먼 이방인의 나라에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한 한국전 참전국이라는 콜롬비아의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졌고, 그 역사의 중심에 바로 고메스(Laureano Gómez)대통령이 서있다. 그는 1889년 2월 보고타에서 태어나 1909년 콜롬비아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안띠오끼아(Antioquia)주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고메스는 1911년 꾼디나마르까(Cundinamarca)주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하였고, 이후 1925년 노동부장관으로 임명되어 정치계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1936년 일간지 엘 씨글로(El Siglo)를 창간하여 보수세력을 대변함으로써 보수세력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1949년의 대선에서 집권당의 폭력정치로 인해 자유당의 후보 에찬디아(Darío Echandía)가 사퇴하자 보수당의 고메스가 단독으로 출마하여 정권을 잡았다.당시 콜롬비아는 개혁세력의 지도자 가이딴(Jorge Eliecer Gaitán)의 암살로 국내 정치적 폭력사태가 만연하였고 게릴라들의 활동과 반정부 시위는 점차 확산되었다.

보수정권은 반란에 대한 효과적인 진압을 목적으로 군과 경찰의 보수화 작업을 진행했다. 국내 공공질서 유지라는 명목 하에 이때부터 군은 정치적 수단으로 동원되었다.

이러한 상황아래 1950년 한국전이 발발했다. 콜롬비아의 보수정권은 미국이 국제문제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외교정책을 수립하였고 미국의 새로운 정책에 순응하면서 기존에 형성됐던 정책의 방향을 바꾸고 조정했다. 고메스 정권은 한국전을 소련의 지원 하에 남한의 적화를 기도한 공산세력의 팽창적 전쟁으로 인식하여 자유세계의 안전이 위협 당하고 있다고 간주한 미국의 시각과 함께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새로이 전개된 국제정치 상황에서 콜롬비아는 UN과 미주기구와 같은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통해 반공주의노선을 기조로 대외정책을 수행했다. 이러한 반공주의 대외정책은 미국의 공산권 대외정책과 보수정권의 반공주의 노선이 일치되는 것이었다. 한국은 냉전의 첫 번째 실질적인 전장이 되고, 동서 진영간 전면전 발발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위협이 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콜롬비아 정부는 한국전 참전의 명분으로 UN헌장에 입각한 평화의 십자군이라는 논리와 집단안보체제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과의 더욱 강력한 결속을 위해서라도 파병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950년 정권을 장악한 고메스 정권은 국내 정치적 안정이라는 과제가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양당의 폭력적 갈등으로 인해 국가기관이 붕괴되고, 정부는 사회적 불안을 통제 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하고 있었다. 조직적인 반정부 게릴라 집단의 반란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에 콜롬비아 정부는 집단 안보 보장에의 도덕적 책임, 간접적인 국가방위 그리고 자유세계의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 하에 한국전 파병을 단행했다. 이러한 명분적인 파병결정 동기는 정권의 안정 유지를 도모하고자 하는 국내 정치적 요인이 가장 중시되었다. 미국과의 관계 맥락에서 참전요인으로 콜롬비아가 제시한 대의명분인 UN 헌장에 입각한 평화의 십자군이라는 논리는 상징적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참전을 가속시킨 요인은 실제로 자체 내의 정치적 안정과 미국과의 강력한 결속을 위해서라도 파병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콜롬비아정부는 자유우방의 지원이라는 명목 하에서 한국 참전을 결정했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과의 협상력 강화를 통해 경제발전과 국내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결국 대내적 정당성이 약화되고 존립기반이 흔들리면서 보완할 정책적 기제를 발견한 고메스 보수 정권은 한국파병을 미국과의 관계 강화와 경제적 안정의 유인책으로 적극 활용함으로써 정치체제의 안정화를 꾀한 것이었다.

고메스 대통령의 한국전 참전 결정은 당시 집권당인 보수당이 패권주의적 양당체제 속에서 국내 자유당세력의 약화를 꾀하고, 참전을 계기로 얻은 신무기 사용의 경험 그리고 새로운 군사적 전략과 전술을 통해 국내에서 전개되는 반정부 게릴라 집단의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고자 했던 정치적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국전 참전은 미국의 요청에 따른 불가피한 파병이라기보다는 당시 대내적 위기상황 속에서 보수정부가 한국 파병을 주체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었다.

자유세계의 의무, 미국과의 동맹관계 강화 및 경제적 이익에의 관심과 국제적 명예를 높이고자한다는 명분론적 근거보다는 참전의 결정을 가속화시킨 계기는 콜롬비아 사회의 내적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고메스 보수 정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당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혼란은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아래 군의 정치적 개입이 시작되었다. 일반대중은 군의 정치적 개입이 권력분배의 중계자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군의개입을 이러한 과정의 전환기로 생각했다. 군부의 구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삐니야(Gustavo Rojas Pinilla)는 국내치안질서 유지에 주력하면서 정치적 안정조치를 단행했다. 게릴라를 진압하고 경찰을 군의 일부로 개편함으로써 국내의 치안질서가 소강상태에 진입했다. 군을 포함해서 양당엘리트의 동맹을 통해 1953년 정권 교체가 시작되었다. 중남미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콜롬비아는 문민우위의 전통이 강한 나라지만, 제한된 사법 경찰력만으로는 질서유지 능력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군부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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