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안태환 작성일 : 2013-11-20 17:59:00 조회수 : 681
국가 : 칠레 언어 : 한국어 자료 : 정치

[칼럼]

 

<칠레의 새로운 사회적 행위자: 학생운동>

 

 

2013.7.3, 안태환/부산외대 중남미 지역원 HK교수 

 

 

 

  칠레는 여러 가지 점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예외적인 국가이다. 1973년의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제일 먼저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국가이기도 하다. 칠레는 아르헨티나에 비해 [더러운 전쟁]의 폭력이 덜 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는 칠레 천주교회가 적극적으로 인권을 지키는 운동을 벌인 때문이기도 하고 피노체트 정부가 체제에 저항적인 많은 지식인과 젊은이들이 해외로 망명을 갈수 있도록 유연하게 대처한 때문이기도 하다. 칠레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경제 맥락에서 가장 강조되는 포인트는 높은 경제성장과 정치적 안정과 시장개방의 연관성이다. 즉 9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파도처럼 또는 “대홍수”처럼 덮쳐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사회적 저항과 혼란으로 어지러울 때 칠레는 소위 “민주연합 정부들”(Concertacion)이 번갈아가며 집권하면서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정치적 정당성과 통치의 안정을 가져왔다. 그 이유는 높은 경제성장 덕분이었다. 물론 그 대가는 컸다. 왜냐하면 민주연합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를 지속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피노체트가 개정한 헌법의 개혁을 시도하지 않고 그 틀 안에서의 ‘민주적’ 개혁에 만족했다. 그렇게 된 맥락은 피노체트 정부의 약 17년간의 폭압정치에서 해방되어 제도적 민주주의로 나아간 것에 대해 칠레 대중이 만족했기 때문이다. 칠레 대중이 만족하게 된 이유는 피노체트 집권 말기의 칠레의 높은 경제 성장 때문이다. 비록 권위주의적 통치를 했지만 경제가 발전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로써 민주연합 정부들의 정책 기조는 그 전의 피노체트 정부와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오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으로 인해 지니계수로 상징되는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매우 높게 만들었고 교육, 의료등의 부문에서 소득 차이에 따라 사회를 위계서열화 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엷어지고 소비주의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거 때 주권자의 선택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우파” 세력들 중에서 선택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칠레의 민주연합정부와 우파 정당 사이의 정책적 차이는 작아진 것이다. 이런 상황이 2000년대에도 지속되어왔다. 그러다가 2006년, 2011년 그리고 올해에도 학생운동이 일어나면서 칠레의 정치지형에 학생들(고등학생들과 대학생)이 중요한 사회적 행위자가 되었다. 이들은 피노체트 체제는 민주연합 정부가 여러 차례 집권했더라도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교육과 의료 부문의 “사회적 공공성”의 확보를 위해 “헌법 개정을 위한 의회”의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나이어린 학생들이 체제 개혁을 주장하게 된 배경은 1980년과 1990년의 교육법 개정을 통한 수 십 년간에 걸친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의 결과 소득의 차이에 따른 공사립 학교 사이의 교육의 차별이 특히 중 고등학교에서의 엘리트 사립학교/보조금을 받는 사립학교/시립학교 등의 교육의 차별이 이루어져 왔다. 사유화와 경쟁의 강화로 차별은 점점 더 심해지고 이 같은 차별이 장래 직업 선택과 소득의 차별 사회 계급의 고착으로 진행되어온 것에 학생들이 저항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2006년과 2011년의 대규모 학생시위를 고등학생 들이 주도하게 된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글로벌 정보화의 덕택에 이웃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변화 즉, 아르헨티나, 브라질, 에콰도르,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등의 교육과 의료부문의 “사회적 공공성”의 강화 흐름에 학생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것이다. 기성세대의 기존의 사회운동 단체나 시민사회 진영이 독재에서 민주로의 이행에 대해 제도적, 형식적 변화에 만족하고 민주체제로의 인식론적, 실천적 단절을 회피해온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민주 개혁세력이 이렇게 어정쩡한 개혁을 추진하게 된 맥락은 과거 1970년의 아옌데의 “민중연합”정부도 그 안에 좌파적인 사회당, 공산당 외에 우파적인 기독교 민주당이 동거했었기 때문이다. 이들 기독교 민주당 세력은 1973년의 피노체트 쿠데타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기독교 민주당의 세력이 피노체트가 권력을 이양했을 때 “민주연합”정부의 핵심세력이 되어 여러 번 대통령을 배출하였다. 이런 칠레의 정치 지형의 흐름을 보면 칠레는 오랫동안 우파 또는 중도우파가 훨씬 우세한 정치지형을 가져왔고 아옌데의 출현은 연합정치를 통해 일시적으로 잠시 출현했던 예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우파 또는 중도우파 사이의 양당 구도의 오랜 흐름이 2006년, 2011년의 학생운동의 출현으로 균열을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 칠레의 역사학자들 또는 사회 과학자들의 큰 관심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1년의 칠레 대선은 매우 중요했다. 이 대선에서 우파 정치인인 세바스티안 피네라가 집권했지만 오랜 양당구도가 깨지면서 사회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 3의 득표를 한 엔리케스-오미나미가 출현했다. 이는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과거의 급진좌파는 아니지만 문화 정치적 비판적 좌파의 형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 같은 정치지형의 변화와 대규모 학생운동의 출현은 칠레 사회의 진보적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사회당 좌파 세력과 군소 좌파 세력이 독자 대선 후보를 냄으로써 비록 득표율은 적지만 유의미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정치적으로는 피노체트-반 피노체트의 수사로 민주연합정부가 정당성을 가져왔지만 경제, 사회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를 지속시키는데 대해 칠레 사회의 상당부분이 반발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즉,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그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칠레 정치의 개혁이 가능한가 여부를 놓고 칠레 학생운동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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