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영 박사 (부산외대 스페인어과)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속령으로, 독립된 나라를 한번도 이뤄보지 못했던 푸에르토리코
‘풍요로운 항구’라는 뜻의 ‘푸에르토리코 (Estado Libre Asociado de Puerto Rico/ Commonwealth of Puerto Rico)’ 는 카리브해 대(大) 앤틸리스 제도의 네 개의 섬들 중에 가장 작은 섬으로,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있는 에스파뇰라 섬의 동쪽에 위치한다.
미국의 자치령이고 그래서 달러를 쓰기 때문에 저렴한 휴양지로서의 장점이 없으며 굳이 먼 길을 찾아 가기에 나라가 작아 볼거리도 그리 많지 않은 이 곳에 한번 꼭 가보고 싶었던 것은 푸에르토리코 출신 음악인들의 노래를 듣다 보니 “저 나라 사람들은 밥 먹고 음악만 하나, 어떻게 저렇게 많은 음악인들을 배출할 수가 있지” 싶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전적 살사의 제왕이었던 엑토르 라보에, 맹인 뮤지션 호세 펠리시아노, 라틴 팝의 대명사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공식 노래 <인생의 컵 (La copa de la vida)>을 부른 리키 마르틴, 차얀느, 까예 13,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나라 푸에르토리코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한 마크 앤소니,
미국에 살았지만 푸에르토리코 음악을 주도한 ‘팀발의 제왕’ 티토 푸엔테스, 소프라노 아나 마리아 마르티네스, <용서해요(Perdón)>의 작곡가 페드로 플로레스와 <보리켄의 탄식(Lamento boricano)>의 작곡가 라파엘 에르난데스 등등 푸에르토리코 출신 음악인들은 알게 모르게 조용히 라틴 아메리카와 미국 음악계의 실세였다.
제니퍼 로페스의 전 남편이자 영화에도 여러 번 출연했던 마크 앤소니의 멕시코 공연 모습
게다가,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한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주인공들도 푸에르토리코 계 이민자들이다. 번스타인이 푸에르토리코 스타일의 라틴 음악을 작곡해 넣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설정했다는 설이 있다.
또 우리가 대충 쿠바 쪽 음악이라 생각하는 살사의 한쪽 축이 푸에르토리코 음악이었다. 6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며 연주되었던 라틴 댄스 리듬 음악이 ‘살사’라고 불리어 졌는데, 그 한 축이 쿠바 출신 음악인들이었다면 그 다른 축이 푸에르토리코 출신 음악인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파나마에서 시작된 스페인어 레게를 ‘레게톤’으로 양식화 하거나 각종 라틴 리듬들을 대중의 기호에 맞추어 라틴 팝으로 만든 것도 푸에르토리코 출신 프로듀서들의 활약이 컸다. 이 정도면 푸에르토리코도 음악의 나라라고 자부할 만 하지 않을까?
푸에르토리코는 예전에 ‘보리켄’ ‘보린켄’, 혹은 ‘보루켄’ 이라 불리었다. 그래서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을 ‘보리쿠아(Boricua)’ 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을 빼놓고 보더라도, 푸에르토리코는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나라다. 아니, 고통스런 역사를 지닌 곳이다. 콜럼버스 도착 이후 타이노 원주민들이 학살되었고, 다른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일찌감치 독립해 있었던 19세기 말까지 스페인 최후의 식민지로 잡혀 있었다. 그러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이제는 미국의 속령이 되었다.
한번도 독립된 나라를 가져보지 못한 그들의 슬픔은 그들의 음악 속에 녹아 있고, 미국의 속령이 된 이후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푸에르토리코인들이 본토의 미국인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 라틴 리듬 계열의 음악이라 그들에게 음악은 삶의 수단이 되었고, 그렇게 푸에르토리코 출신 음악인들은 점점 양성되어 간 것이었다.
푸에르토리코의 수도는 산 후안으로, 보통 미국의 마이애미에서 비행기를 타고 들어간다. 산 후안의 루이스 무뇨스 마린 국제 공항에 내려 숙소를 예약해 놓은 푸에르토리코 대학교 앞에 어떻게 갈 수 있는지 공항 안내에 물어봤더니, 조금 먼 편이라 버스를 타면 오래 걸리니까 택시를 타고 가는 게 좋을 것이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버스를 타도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고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다. 나라가 워낙 작다 보니 거리 개념이 달라지는 것 같은데 어딜 가나 멀지 않아 금방 갈 수 있는 게 편하긴 했다.
산 후안의 지하철
대중 교통망 자체는 미국식으로, 도시 전체 구석구석에 버스가 다 가긴 가는데 그러다 보니 빙빙 도는 경향이 있고 또 버스가 자주 안 온다는 문제가 있긴 했다. 대신 깨끗한 지하철도 있고 도시 자체가 작아서 미국과는 달리 대중 교통만으로도 이동하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푸에르토리코는 여느 카리브해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1년 내내 뜨거운 날씨로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룩주룩 흐를 정도지만, 나라 분위기는 카리브 해 나라들 중에 제일 차분한 편이었다. 도시도 조용하고, 사람도 그리 많지 않고, 관광객도 많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자체가 미국적이라 ‘역시 여기는 라틴아메리카이자 앵글로 아메리카인 곳이 맞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얼마 있지 않았기에 단정할 순 없지만, 극단적인 가난에 내몰린 사람들도 그리 자주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여느 카리브해 나라들과는 달라 보이는 점이었다.
리오 피에드라 지구에 있는 푸에르토리코 대학교 본부 건물 입구
자연과학대학 건물
개인적으로 놀라운 것은 푸에르토리코 대학교(UPR)였다. 리오 피에드라 지구에 중앙 캠퍼스가 있는데 공립 대학교임에도 눈이 휘둥그래지게 시설이 좋은데다 학교 앞에 기숙사와 기숙학생들을 위한 상가가 형성돼 있는데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기숙사는 고급 오피스텔처럼 근사한데다 상가도 고급 쇼핑 센터 같다.
학교는 새떼가 날아드는 드넓은 숲을 다 차지하고 있는데 날이 덥다 보니 낮에는 오히려 조용하고 껌껌한 밤중에 전깃불을 최소한으로 켜고 주로 야외에서 이것저것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밤에 학교 야외 정자에서 새소리를 듣고 바람을 맞으며 요가 수업을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학교 안으로 지하철이 들어오고, 또 학교가 공립이기 때문에 그 좋은 시설들을 시민들에게 모두 제공했다. 나 같은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도서관 컴퓨터도 마음껏 쓰고 음악대학 자료실에 가서 푸에르토리코 음악인들의 악보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그런 좋은 학교, 좋은 시설들도 다 미국식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좋은 시설에서 공부하는 푸에르토리코의 엘리트들인 학생들 중 일부는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의 한 주가 되는 것에 반대하며 푸에르토리코의 자주 독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푸에르토리코 독립주의자로 활동하다 FBI에 체포돼 36년째 감옥에 갇혀 있는 오스카르 로페스 리베라를 위해 그린 푸에르토리코 대학의 그림들
2012년,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의 한 주로 편입되는 것에 대해 주민 총 투표를 한 결과 투표자들의 절반 이상이 미국의 한 주가 되는 것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간 여러 번 같은 주제로 총 투표를 했지만 찬성표가 과반을 넘긴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푸에르토리코 주민 전부가 투표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총 투표 결과가 민의를 모두 반영한다 볼 수 없고, 또 미국 쪽에서도 푸에르토리코를 새로운 주로 받아들이려면 여러 까다로운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2012년의 이 총 투표 결과는 아직 현실로 나타나진 않았다. 하지만 푸에르토리코의 역사에 있어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할 수 없겠다.
산 후안의 역사 지구에는 콜럼버스의 요새가 남아 있다. 콜럼버스 도착 이후 한번도 자기들 스스로의 나라를 가져 보지 못한 푸에르토리코에서도 스페인에 대항해, 이후에는 미국에 대항해 독립 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거나 거의 평생을 갇혀 산 사람들도 있었다. 독립주의가 고취되던 1930년대에 작곡가 라파엘 에르난데스는 미국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조국을 꿈꾸며 <프레시오사(Preciosa)>라는 아름다운 볼레로를 만들었다. 아래는 노래의 가사 중 일부분이다.
‘에덴 동산이 되어야 할 이 곳, 어머니 스페인의 고귀한 기품을 지녔고, 용감한 원주민들이 세운 돌들 또한 지녔으니 (중략) 폭군이 검은 악을 가져와도 중요치 않으리. 깃발도 없고 월계수도 없고 영광도 없지만 우리는 자유의 아들들이기에.’
콜럼버스의 요새에서 카리브 해를 바라보며 이 노래를 한번 불러 보았다. 우리가 자유 국가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우리의 어머니는 스페인이기 때문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논리인가. 그런데 1930년대 당시 푸에르토리코 지식인들의 생각은 정말로 그랬다. 우리는 스페인 문화의 세례를 받은 스페인어권 아메리카지 앵글로 아메리카가 아니기 때문에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콜럼버스 요새에서 바라본 카리브 해
서글픈 논리지만 이젠 그 논리마저도 그리워질 정도로 경제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 그렇게 꿈꾸던 독립 국가 푸에르토리코를 이루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나은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민투표의 절반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지려 하면 저돌적인 랩을 부르는 ‘까예 13 (Calle 13)’의 곡들을 들으면 된다. 이 혼란스런 와중에도 또 ‘까예 13’처럼 독립 푸에르토리코 공화국을 꿈꾸는 젊은이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푸에르토리코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2015년 국가 부도 사태를 맞으며 경제를 살릴 수 있게 미국의 한 주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목소리를 더 높이고 있고 반대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에서 푸에르토리코가 주로 승격될 가능성은 없으니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거세지고 있다. 그 와중에 올해 2017년에 또 한번의 주민 총 투표가 실시될 예정이다.
투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푸에르토리코 전 국민들이 백 프로 다 투표하지 않는 이상 주민 총 투표의 결과로만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또 제기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탐탁지 않아 하며 법리적인 문제를 빌미로 피일차일 논의를 미룰 가능성이 높다.
앵글로 아메리카인 미국의 한 부분이자 라틴아메리카 나라들과 같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해 온 푸에르토리코, 친절했던 푸에르토리코 대학의 교직원들과 학생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산 후안을 떠나올 때,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까예 13’의 노래를 들었다.
그들의 대표곡인 <라틴아메리카 (Latinoamérica, 2011)> 에서 르네 페레스는 숨가쁜 랩으로 역사 속에서 같은 아픔을 곱씹고 같은 문화를 향유했던 ‘라틴아메리카’의 연대를 계속해서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친다.
“내 삶은 너네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No puedes comprar mi vida)”.
Viejo San Juan (Old San Ju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