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진 (대구가톨릭대 스페인어 중남미학부 교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Gossens, 1908-1973)는 칠레 중부 항구도시 발파라이소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베르나르도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과 함께 스페인군에 저항했던 독립 영웅이었다. 조부는 의사이자 정치인이었고, 아버지는 변호사였는데, 모두 급진적인 정치 성향을 보였다. 살바도르 아옌데 역시 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민중들을 위한 삶을 선택했다. 칠레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관심이 많았던 그는 칠레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사회주의 학생 조직에서 활동했다.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Carlos Ibañez del Campo)의 독재로 국가가 혼란스러웠던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소비에트 방식의 혁명을 주장하자 아옌데는 칠레식 혁명을 주장했다. 소련과 칠레는 사회구조가 달랐기 때문에 폭력적인 방식의 혁명으로는 칠레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좌파 진영은 늘 분열되어 조직적이지 못했고, 폭력적인 혁명도 개혁을 위한 선거 승리도 이루어지내지 못했다.
의대를 졸업하고 외과의사가 된 아옌데는 부검의사로 일하면서 칠레 민중들의 비참함을 목격하였고, 사회당 창당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당시 사회당은 상이한 집단이 모여 구성한 조직이었지만, 좌파 진영이 연합했다는 데서 큰 의의가 있었고, 공산당과 연합할 수만 있다면 아옌데가 꿈꾸던 사회변혁은 가능했었다.
아옌데 정권 이전에도 사회주의 정권은 있었다. 1932년 마르마두케 그로베(Marmaduque Grove)가 쿠데타로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공산당을 배재함으로써 좌파는 분열했고, 대중의 지지를 받지도 못했다. 이처럼 좌파 진영이 분열하지 않고 함께 민주적인 방식의 혁명을 추진하는 것, 이것이 아옌데가 주장하는 ‘칠레식 혁명’이었다. 다시 말하면 집권을 통해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국가의 변혁을 민중의 참여와 절차에 의한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상·하원 의원,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한 아옌데는 1970년 공산당 대통령 후보였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가 출마를 포기하면서 좌파연합인 인민연합(Unidad Popular) 후보로 선출되었고, 선거 전 CIA의 대대적인 사보타주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2위와는 겨우 1.3%의 득표 차. 좌파 진영이 연합하지 않았다면 아옌데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옌데는 민주적 선거로 당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회정치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려는 목표가 분명하였으므로 국제 사회는 아옌데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아옌데가 취임하고 이틀 뒤인 11월 6일, 닉슨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칠레식 사회주의가 다른 중남미 국가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정권 전복을 위한 비밀공작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국무부, 국방부, 국가안전보장회의, 중앙정보국 등은 칠레 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고,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협조하여 아옌데 정부를 외교적으로 고립시켰고, 국제금융기구의 대출과 다국적 기업의 수출을 막아 경제적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아옌데는 ‘칠레식 혁명’을 추진해나갔다. 외국 기업 소유의 구리 광산을 국유화하였고, 교육과 의료 부문에 대한 공공성을 강화하였다. 개헌으로 양원제를 단원제로 바꾸고 동시선거와 주민소환제도를 도입하기로 하였으며, 노동자와 시민사회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했다. 남녀 동일임금제나 주택 공급 계획, 국가 차원의 공교육제도, 토지 개혁과 같은 사회개혁 프로그램도 입안하기로 했다. 근본적인 국가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인민연합 정부에 참여한 정당들의 집권 목적은 달랐다. 인민연합 내부에는 여전히 소비에트 방식의 혁명, 즉 인민들이 폭력적 갈등을 통해서라도 사회주의를 쟁취해야 한다는 세력과 아옌데의 다원주의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이 부딪혔다.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혁명적 폭력이라며 민중정부를 구성했던 인민연합 내 좌파혁명운동(MIR),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했던 대통령 아옌데, 그리고 아옌데 정부와 이념적으로 유사하면서도 정권 재창출이 목표였던 기독민주당과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려했던 미국. 미국은 우파 언론을 통해 사회당의 폭력을 소련식 혁명으로 크게 부각하여 국민들의 공포감을 조성하였고, 기독민주당 조직을 재건하는데 자금 지원을 하기도 했다. 칠레의 주요 수출품인 구리 가격이 폭락함에 따라 외환보유고는 감소했고, 우파 세력은 제조업자들과 트럭운송업자 등을 사주하여 파업을 유도함으로써 전국의 상점 곳곳에 물건이 없어 판매를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등 경제는 마비되었다.
그리고 쿠데타. 1973년 9월 11일 아옌데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육군 최고사령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물론 미국이 배후라는 것은 미국의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사실로 드러났다.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쿠데타군에 맞서 직접 총을 들고 저항하다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그가 쿠데타군의 폭격 속에서 국민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연설은 그가 아직도 우리 곁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피노체트 독재를 지나 다시 민주주의. 아옌데가 완성하지 못한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고자 이제 칠레 민중들이 외친다. “교육 개혁, 연금 개혁, 노동 개혁......”
아옌데는 현재 칠레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물론 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미국과 우파 세력의 사보타주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갈등 조정이 정치의 본질이고, 대통령의 역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연합 내부의 이질적인 스펙트럼을 조율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경제 실패의 책임,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는 정치·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앞서가는 복지정책을 도입하고, 인권 증진이나 공직자 윤리, 교육 및 공공서비스 개선과 같은 사회 변혁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다른 정치세력과 함께 연대와 개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칠레는 아옌데가 그랬던 것처럼 좌파진영이 연합하여 민주정부를 출범시켰다. 당시 인민연합은 분열했지만, 민주화 이후 좌파연합은 기독민주당과도 연합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칠레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변했을까? 불행히도 피노체트 군사 정부는 아옌데의 개혁을 되돌려놓았다. 오히려 피노체트가 남긴 신자유주의와 신헌법은 아옌데가 그토록 개혁하고 싶었던 칠레사회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학생들은 교육의 질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고, 의료 및 연금 민영화로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최저임금은 50만원에도 미치지 못하고, 정부는 마푸체 원주민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된 지금 칠레 국민들은 그들 스스로 더 나은 사회 건설을 위한 길을 열어가고 있다. 아옌데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이자 작가인 이사벨 아옌데, 막내딸 상원의원 이사벨 아옌데, 그리고 피노체트 지지자 세바스티안 피녜라 전 대통령 부부>
<사진: 칠레 대통령궁 앞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