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모(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스트로에스네르(Stroessner)는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군부독재정권을 유지한 인물이다. 스트로에스네르는 1954년부터 1989년까지 35년간 파라과이를 통치하였다. 이 당시 파라과이는 연평균 5.4%의 GDP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시기에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이유는 미국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당시에 미국은 자신의 ‘앞마당'인 라틴아메리카가 구소련의 영향권에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특히 미국 정부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정치세력들을 활발히 활동했던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 플라타(La Plata)지역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는 1953년 1월 2일에 아순시온 주재 미국대사관의 존 실록(John Shillock) 일등 서기관이 미국 정부로 보낸 비밀문서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의 목적은 전쟁이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라플라타 지역이 경제적 어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개발을 유도하여 경제적 안정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는 반구의 안전과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가 침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Farina & Boccia 2010: 23)
미국은 라플라타 지역의 안보를 위해 파라과이 주재 미국 대사관과 긴밀한 전략을 구사하였는데, 이는 공산주의로부터 라플라타 지역을 지킬 수 있는 주요한 거점지역으로서의 파라과이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파라과이가 구소련의 손아귀에 넘어간다면 남미지역이 공산주의화되는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당시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Juan Peron)과 브라질의 제툴리우 바르가스(Getulio Vargas) 정부는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를 지향하고 있어서 미국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파라과이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지리적인 측면 이외에도 미국은 파라과이 자체가 영토나 인구면에서 보잘 것 없고 매우 가난하며 정부도 부패하고 무능하여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이 침투할 위험성이 높은 국가로 판단하였다.
이에 미국은 파라과이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이를 뒷받침할 대상을 찾던 중 스트로에스네르가 적절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스트로에스네르는 젊고 정치적 경험이 미천하여 미국 정부가 통제하기에 수월한 인물이었다. 미국 정부는 스트로에스네르가 집권하기 1년 전부터 그를 불러들여 새로운 정권 창출을 위한 사전 작업을 실시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로버트 스티븐(Robert Steven) 육군성 장관은 1953년 5월에 그를 미국으로 초대하였다. 그 후에 스트로에스네르는 주목받는 군부로 당내에서도 자기만의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쿠데타를 통해 차베스 정부를 끌어내린 후 이듬해 8월 15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스트로에스네르의 취임 후 파라과이와 미국과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이미 스트로에스네르는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아이젠하워(Eisenhower)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반공법(Ley 294/55)을 1955년에 통과시켰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부에 대항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공산주의자로 신고할 수 있으며, 또한 곧바로 고소도 가능하다. 모든 공무원들은 약간이라도 공산주의자로 의심이 가는 사람들, 그리고 의혹이 가는 단체나 공동체도 고발할 수 있다(Farina & Boccia 2010: 32).
스트로에스네르는 미국이 파라과이의 공산주의화에 상당한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집권과 동시에 반공법을 통과시켰으며, 이를 통해 자신이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스트로에스네르는 반공주의 정책을 추진한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제공받았다. 미국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6년간 파라과이에 3천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사진 1] 이타이푸(Itaipú)댐 전경
또한 스트로에스네르는 당시 친미노선을 걷고 있던 브라질의 쿠비첵(Kubitschek) 정부와 협력을 한다. 미국은 브라질을 통해 파라과이에 차관을 제공하여 아순시온과 브라질 국경도시인 이과수를 잇는 고속도로와 다리를 건설한다. 이 사업은 동진정책(Marcha del Este)으로 불렸고, 다리의 이름은 두 국가의 친밀한 관계를 상징하듯 우정의 다리(Puente de Amistad)로 명명하였다. 파라과이는 이 시기부터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브라질과 경제 교류를 확대하였다. 양국의 국경에 흐르는 파라나 강(Río Paraná)에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댐인 이타이푸(Itaipú)댐(현재는 중국 샨샤댐이 가장 큼)을 공동으로 건설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실시된 것이었다. 이타이푸 댐을 건설한 1970년대에 파라과이는 연평균 GDP 성장률이 8.3%에 달했다. 1977년에는 파라과이 역사상 가장 높은 GDP 성장률인 14%를 기록하였다.
결국 스트로에스네르는 미국의 반공주의 정책을 받아들임으로서 일석이조 효과 누릴 수 있었다. 그 하나가 반공주의를 통한 반정부인사들의 제어이며, 다른 하나는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구조를 통해 스트로에스네르 정부는 집권 기간 동한 정치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찾아보기 힘든 장기 독재 체제의 기반이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바로 원조라는 명목으로 지원된 미국의 경제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하였다.
참고문헌
1. Farina & Boccia, 2010 El Paraguay bajo el Stronismo 1954-1989. Asunción: El Lector.
2. Espinola, Zulma, 2010 Historia Economía del Paraguay, Asunción: El Lec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