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과이] 루고 대통령 탄핵과 정치적 의미
작성자 : 구경모 작성일 : 2012-07-04 12:02:01 조회수 : 1,096
국가 : 파라과이

2012년 6월 22일 오후 5시(한국시간 6월 23일 오전 5시)경에 파라과이 페르난도 루고(Fernando Lugo)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불과 17시간 만에 하원과 상원에서 루고의 탄핵을 게눈 감추듯이 결정하였다. 필자 주변의 현지인들은 이것이 명백히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라고 분노했지만 아무도 선뜻 불합리함을 바꾸기 위해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자조 섞인 어투로 이렇게 말하였다. “파라과이인들은 (불합리성에 대해)하루 흥분하고 그 뒤에는 바로 잊어버려...” 탄핵전과 후에 몇 천명이 군중들이 의회 앞에서 시위한 것을 제외하면, 이들의 말처럼 파라과이는 언제 탄핵이 있었냐고 내게 묻듯이 너무나도 평온한 상태에 있다.

 

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는 페르난도 루고의 처신이 탄핵이후 파라과이 정국이 고요하게 흘러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루고는 탄핵의 절차와 정황이 쿠데타와 유사하지만, 어찌되었건 의회의 공식적 절차를 거친 만큼 인정하고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는 사임 연설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그는 탄핵의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을 존중하면서 국민들이 피를 흘리는 내전(guerra civil)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루고는 스스로를 예수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희생으로만 이 사태가 끝나기를 바라며 국민들이 동요하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 페르난도 루고의 대통령 당선에서 탄핵까지

 

파라과이 루고 대통령은 가톨릭 사제로서 산뻬드로 주에서 주교를 엮임 했다. 산뻬드로 주는 파라과이에서도 오지로서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지역처럼 가난한 농민을 대변하는 반군(파라과이민중군, EPP)들의 주둔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루고는 그곳에서 소농과 노동자를 대변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수식어인 '빈자의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그후 루고는 압도적인 여론조사의 지지를 바탕으로 루고는 유력한 대선주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고는 사제였기 때문에 정치 기반이 매우 허약하였다. 그는 2007년에 10월에 중도좌파 성향이 군소정당인 기독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후 루고는 기독민주당을 포함한 8개의 중도좌파 성향의 정당이 연합한 '변화를 위한 애국동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다. 그후 파라과이의 제1 야당이자 중도계열인 자유당(PLRA)까지 연합하면서 루고는 거대한 야당연합을 구성하게 된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루고는 자유당의 수장인 페데리꼬 프랑꼬를 부대통령으로 한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루고는 자유당이 지지를 철회하면서 정치 기반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이는 탄핵이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물론 의회에 상정된 탄핵의 표면적인 사안은 6월 15일 까닌데주 주의 꾸루과뜨(Curuguaty)에서 벌어진 농민과 경찰간의 유혈사태로 이지만, 심층적인 요인은 정치 기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탓이다. 루고의 허약한 정치 기반은 임기 내내 ‘친자논란’을 통해 보수 야당의 공격을 받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오히려 제대로 된 우군(友軍)없이 림프종이라는 병마와 싸우면서 4년 동안 버틴 것이 대단할 따름이다.

 

탄핵결과 분석해 보면, 루고의 지지기반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잘 알 수 있다. 탄핵 결과는 하원에서 총 80표 중 찬성 76표, 반대 1표, 기권 3표가 나왔다. 상원에서는 총 45표 중 39표이며, 반대 4표, 기권이 2표였다. 파라과이의 주요 정당인 콜로라도당(Paritido colorado)과 꼴로라도당에서 분리된 우나세(UNACE)는 우파이며, 빠드리아 께리다(PPQ)는 중도우파이다. 중도성향으로 연립정부를 구성했던 자유당(PLRA)까지 이미 루고와 결별을 선언한 상태에서 탄핵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고를 지지한 상원의원은 고작 각각 다른 군소 좌파 계열 정당 3명의 의원과 자유당 의원 1명뿐이었다.

 

 

* 파라과이 정치사에서 루고 정부의 의미와 한계

 

파라과이는 의회정치가 시작된 1887년 부터 콜로라도당(홍색당)과 자유당(청색당)의 양당체제가 꾸준히 지속되었다. 현재는 우나세와 빠뜨리아 께리다가 어느 정도 의석을 확보하고 있지만, 우나세의 경우는 콜로라도당에서 분당한 사례로서 여전히 파라과이 정당 정치의 헤게모니는 콜로라도와 자유당 양당이 장악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들 두 정당은 상원의 총 45석 중 28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하원의 총 80석 중 60석을 차지하고 있다. 우나세는 상원 9석과 하원 10석을 차지하고 있어 콜로라도 계열당과 자유당은 상하원 의석을 각각 37석과 70석을 확보하고 있다. 빠뜨리아 께리다는 상하원을 각각 4석씩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좌파계열 정당은 상하원 각각 3석과 2석을 차지하고 있다.

 

콜로라도당은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으로 1887년부터 1904년까지 파라과이의 정권을 잡았으며, 자유주의에 입각한 자유당은 1904년에 정권을 잡아 차코전쟁 이후인 2년(1936,37년)을 제외하고 1946년(1940년까지 보는 경우도 있음)까지 헤게모니를 유지하였다. 냉전의 시작과 함께 미국은 중남미 친미정권의 거점으로 남미의 심장부에 위치한 파라과이에 군사원조와 정치적 지원을 하였다. 1947년 콜로라도 당은 미국의 지원과 함께 자유당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 부터 콜로라도당은 중남미의 장기 군부독재로 이름을 떨친 스뜨로에스네르(1954~1989)를 비롯하여 니까노르 두아르떼 정부까지 이어졌다.

 

2008년의 루고 당선은 61년만의 정권교체이며 파라과이 최초의 문민 좌파 정권(파라과이 최초 좌파정부는 1936~1937년 집권한 2월혁명당의 라파엘 프랑코 장군 집권시기)라는 의미에서 파라과이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다. 또한 정치사적 의미를 떠나 사제 출신의 대통령이 당선된 것도 하나의 이슈가 되었다. 또한 루고는 '빈자의 어버지'답게 농지개혁과 의료 및 빈민 복지에 치중했으며, 파라과이 입장에서는 민족주의를 강화하면서 주변의 강국과 대등한 외교를 펼치려고 노력하였다. 그 사례 중의의 하나가 바로 이따이뿌 댐(브라질과 공동소유)과 자시레따 댐(아르헨티나와 공동소유)의 전력 수출비용을 현실화한 것이다. 이러한 루고의 개혁정책은 기득정당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연립정부의 구성원인 자유당이 등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루고의 허약한 정치적 기반은 의회나 행정부 권력 장악을 위해 불가항력적으로 자유당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목을 옥죄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루고 정부는 많은 정치경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해묵은 파라과이 양당체제의 패러다임을 극복하지 못하였고, 이것이 바로 탄핵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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