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작성일 : 2017-03-07 16:19:29 조회수 : 2,783
국가 : 쿠바


 

박종욱 (前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저개발의 기억>으로 일약 세계적 감독이 된 또마스 구띠에레스 알레아(Tomás Gutiérrez Alea: 1928-1996)는 수도 아바나에서 태어났다.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가 그랬듯, 구띠에레스 알레아의 젊은 시절 또한 폭풍우처럼 사회를 휘감아 도는 이념의 대립과 사회적 갈등을 온몸으로 수용하며, 이후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선도하는 성찰적 세계관으로 체화한다.

아바나 대학 시절부터 사회적 실천에 적극적이던 알레아는 52년에 이탈리아로 영화 유학을 떠나, 이념의 형이상학적 추구와 실증적 실천의 이율배반과 유격의 기로에서 네오레알리즘(Neorrealismo) 등 사회적 실천에 대한 담론을 화두로 내세운 리얼리즘 계열의 세계관에 집중할 기회를 갖는다.

2년 뒤 바티스타 정권의 억압이 횡횡하던 쿠바로 돌아온 알레아는 사빠따 광부들의 이야기를 다룬 16mm 중편영화 'El Megano'(55)를 비롯한 여러 중단편 영화를 제작하지만, 50년대 영화인으로서 알레아의 입지는 쿠바 사회와 영화계에 특별한 영향력을 미칠 만큼 존재감을 드러낼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쿠바 영화를 논의하자면, 1959년 1월 1일 선언된 쿠바 혁명을 기점으로 이전(before)와 이후(after)의 개념을 우선적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한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과 특징을 포괄적 특질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질서의식과 가치이념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들이 빚어내는 패러다임과 그에 따른 특징을 살펴보아야 하며, 또한 구성요소의 본질적 전환을 계기로 찾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나아가, 쿠바 혁명은 쿠바 사회의 문화예술의 정체성 변화에 본질적 계기이고, 구체적 방향성 정립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물론, 혁명의 당위성이나 옳고 그름은 별개의 논의 대상이다.

역사적 사건을 경계로 '이전'과 '이후'를 얘기할 때, 현대사의 시점에서 보다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늘 '이후'가 되곤 한다. 역사적 배경에서 '이후'의 결과보다는 '이전'의 동기 분석에 개인적 학문 세계의 역점을 두려는 개인적 취향을 지닌 필자로서는 '이후'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들을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를 전망해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물신적 취향에 빠져 그저 최신 동향이나 유행에 본질적 가치를 놓치는 '지식 실용주의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폄하하고픈 마음을 스스로에게 들키며 깜짝 놀라곤 한다.

그런데, 쿠바 신영화의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이전'은 바라볼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전' 영화와 '이후' 영화의 질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만큼 혁명 이전의 영화는 사건이 경계로서의 분명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기에 충분하다. 혁명 이전의 영화는 아무래도 식민통치 이후 미군정에 의한 사회문화적 분위기에서 서구의 영화 산업과 영화 패러다임을 주체적 시각을 형성하지 못한 채 그저 매너리즘의 연장선상 이외에 내세울만한 특징적 요소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알레아와 같은 실천적 지식인들의 노력도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할리우드와 파리, 로마,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구축된 서구 영화 산업이 점차 자본과 이념으로 스스로를 무장하며, 배타적 이념을 생산하고, 오리엔탈리즘을 파생하고 있는 동안, 쿠바와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대표되는 라틴아메리카는 영화를 고급 취향의 외피를 걸친 서구 중심적 대중문화의 소비재로 입맛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숭늉 대신 커피를 마시게 되었고, 어느새 커피에 중독이 되고 있던 우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중사회를 경험하는 서구의 수많은 이들처럼 수동적 지위에 놓여있었 뿐이었다. 세계 균일화의 가치 개념이나 대중소비사회의 기호 등에 대한 논의는 훨씬 뒤에 나오게 될 일이었다.

쿠바 혁명 이후 영화의 본질은 크게 바뀌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쿠바 혁명이 쿠바 영화를 변화시켰다, 라기 보다는 변화를 꿈꾸던 구띠에레스 알레아 같은 문화예술인들이 영상매체 기반 문화생산을 통해 혁명을 주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후 혁명의 방향성과 영화의 발전 방향이 일관된 것은 아니었으며, 적지 않은 갈등과 반목이 되풀이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혁명이 소위 말하는 체 게바라나 피델 카스트로와 같은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인물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쿠바 혁명이 완수된 것인지, 혁명이 성공적인지, 논란은 계속되는 상황에서 분명한 사실의 하나는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혁명에 참여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통해 나름의 사회적 실천에 참여하려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 공과의 유무와 대소와 관계없이, 한 사회의 혁명과 변화는 몇몇 개인의 노력에 따른 결과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 이후 영화 산업과 영화 활동에 적극적 변화를 이룬 것은 ICAIC(쿠바영화예술산업기구: Instituto cubano de arte e industria cinematográficos)의 설립과 관련이 있다. 이른바 라틴아메리카 신영화 운동의 한 축을 이루는 쿠바 신영화 운동의 산실로서 ICAIC의 설립은 상징성 이외에 실천적 의미를 지닌다. 구띠에레스 알레아 감독은 ICAIC의 설립과 운영에 긍정적 영향력을 제공함으로써, 쿠바 신영화의 부흥기를 마련한다.

알레아 감독은 쿠바 혁명 정부를 지지했지만, 단순하게 정치적 혁명 세력에 동조하는 감독이 아니라, 권력화 되는 정치세력가들을 포함한 모든 쿠바인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지향적 '쿠바성'을 편견과 왜곡 없이 제시하는 당당함을 줄곧 견지해왔다. 그의 작품 세계는 쿠바 혁명의 당위성을 논의하기보다는 일상적 삶에 내재된 관성과 관료들의 타성을 비롯하여, 소위 혁명정부라는 주체적 정치권력의 핵심부가 지닌 문제점과 무기력을 성찰적 시각으로 다뤘다.

5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그는 60년대와 70년대 쿠바 신영화의 부흥기를 선도했다.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딸기와 초콜릿(93)>과 <관타나메라(95)>을 내놓으며, 변화하는 세계의 패러다임 속에서 공허한 구호를 반복하는 헛된 혁명의 꿈을 추억하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동성애, 주술종교, 매춘, 개방, 협력, 소통, 연대 등 현대사회에서 제기되는 다변화된 가치와 패러다임을 선택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변화를 향한 성찰적 태도들을 제시하였다.

1996년 작고한 구띠에레스 알레아는 퇴색한 혁명의 깃발 뒤에 비겁하게 숨지 않고, 진정한 용기와 성찰적 태도를 견지하며, 과연 무엇이 대중을 위한 삶이고, 진정한 혁명의 정신이었는지, 자기 반성적 성찰자이며, 쿠바 관객을 포함한 세계의 많은 관객들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주장하고, 선동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성찰하기를 원했다. 알레아는 물신적 욕망이 넘쳐나는 현대에 보기 드문 실천적 지식인이며, 행동하는 영화인으로 수많은 세계 영화팬들의 뇌리에 남겨질 것이다.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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